• 최종편집 2020-04-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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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안-'동양의 피라미드' 고구려 유적을 만나다
    단둥에서 압록강을 따라 새로 난 길을 6시간쯤 타고 가거나, 선양에서 남만주를 가로지르는 도로로 8시간쯤 동진하면 지안(集安)에 닿는다.    동북지방은 고구려가 처음 도읍했던 도시이자 간도협약 이전엔 우리나라 영토였던 곳이다. 고구려 유적은 우리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곳이다.    그런데 2003년 후반기에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억지 시도를 하면서 한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고구려 유적의 중심지는 압록강변에 있는 지안(集安)이다. 이곳에는 광개토대왕릉비를 비롯해 장군총, 환도성 유적 등 각종 유적이 적지 않다. 원래 고구려는 졸본(현재 환런 桓仁)에 나라를 세웠다.  지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하지만 이곳은 산이 너무 높고 험해 외적의 침입을 막는 데 유리하지만 정치, 경제, 문화 측면에서 도읍지로는 적합하지 못했다. 특히 주변 여러 부족국가들이 강성해지면서 ‘졸본’은 도읍지로 구실을 제대로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지안이었고 유리왕 22년에 천도하게 된다. 지안은 온난한 기후와 풍부한 물자를 가진 곳이었다. 이곳에서 고구려는 얼마간의 영화를 누렸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평양으로 천도하게 된다.    지안의 고구려 유적은 오랫동안 잘 관리되어 오지 못했다. 특히 공산화 이후에 국경 문제를 부담스러워한 중국은 고구려에 대한 우리나라의 관심 자체를 차단하기 위해 적지 않은 공을 들였다. 최근에 역사 문제가 불거지면서 취재 등을 위해 지안을 방문하는 것을 막는 등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지안에서 우선 꼭 들를 곳은 장수왕릉(長壽王陵)이다. 동양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장수왕릉은 장군총(將軍塚)으로 불렸다. 입구에 들어가면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독특한 돌로 쌓은 능의 전면이 보인다.    이 능은 화강암을 정성 들여 가공한 돌로 일곱 층으로 쌓았다. 학계에 따르면 장수왕릉의 방식인 돌무지돌방무덤(積石石室墓)은 대체로 3세기 말∼4세기 초로부터 5세기에 나타나며, 기와를 통해서는 4세기 중엽 이후 5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므로 이 장군총의 연대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추정할 경우 무덤의 주인은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5~413)이나 장수왕(長壽王 394~491) 중의 하나로 본다.   장군총  장수왕릉의 아래에 광개토대왕릉비 및 호태왕릉이 있다. 아버지의 묘가 아들인 장수왕릉의 묘 보다 약간 낮은 곳에 위치해 의심을 받지만 광개토대왕릉비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가장 소중한 자료이자 또 비문의 해석으로 뜨거운 감자가 돼 온 유적이다.    이 비는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長壽王)이 왕 3년(414년)에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당시 수도였던 압록강 유역인 중국 길림성 통화전구 집안현 통구성(吉林省 通化專區 輯/集安縣 通溝城 - 중국 현지에서는 集安縣)에서 동북쪽 약 4.5km 지점의 태왕촌(太王村)에 있다. 비는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의 사면석이나 자연스러운 모습의 긴 바위 모습이다.    태왕릉비   그곳에 처음 들렀을 때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시작되기 이전인 2002년이었다. 중국 내부에서는 이미 동북공정이 한참 준비되어 일체의 동영상 촬영이 금지되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후 광개토대왕릉비는 유리로 된 보호망이 만들어지는 등 곡절을 거쳤다. 근대에 들어서 일본에 의해 비문이 훼손되고, 지금은 중국에 의해 수난당하는 유산을 보는 것은 씁쓸하다.    사실 그 땅에 존재했던 어떤 권력자도 100여년 넘기기 힘든 것을 봐왔던 비석이다. 자신이 주인인양 비문을 훼손하고 곡해하는 후손을 보는 느낌은 씁쓸하기 그지 없을 것 같다.   지안 시내 곳곳에는 국내성의 흔적이 있다. 또 시의 동쪽인 압록강인데 보트 등을 통해 북한 쪽에 접근할 수 있다. 도시의 서북향에는 환도산성이 있다. 과거 관구검이 넘어와 고구려를 위기에 빠뜨린 곳이다. 산성은 복원되어 있는데 성의 면모는 거의 없다. 성 아래에는 고구려 무덤의 집합군인 산성하 무덤군이 있다. 크고 작은 묘들은 과거 고구려의 영화를 한눈에 느낄 수 있게 한다.     글 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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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기전에 가야할 중국 여행지
    2020-03-31
  • 단둥-한북중이 만나는 동아시아 바로미터
    아마 지금 지구상에 이런 느낌을 주는 장소가 많지 않을 것이다. 낮에 강 위에서 서서 동쪽은 보면 낡은 인민복과 건물들이 마치 1950년대 어느 도시를 연상시킨다.   단둥 시장    반면에 서쪽을 보면 일년도 되지 않아서 스카이라인이 바뀌고, 도시 남북에 신도시들이 생겨난다. 아마 이런 분위기가 가장 생경한 이들이 동쪽에 사는 북한 신의주 사람들일 것이다.  그 도시가 바로 단둥이다. 단둥은 압록강과 신의주를 볼 수 있는 곳이어서 우리나라 여행객들에게는 독특한 감회를 주는 도시다. 1907년 청나라는 이곳을 무역항으로 개방했고, 압록강을 타고 온 물자나 지린성 등지에서 물자들이 모이는 중요한 항구 기능을 하고 있다.    단둥 자체의 여행에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시 중심에서 10분 정도만 걸으면 압록강에 닿을 만큼 가깝다. 유람선을 타고 강 중심으로 갈 수 있는데, 이곳에서 북한 신의주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우선 이곳에 가면 압록강 단교(鴨綠江 端橋)를 만날 일이다. 1911년 10월에 완공된 다리였는데, 1950년 11월부터 1951년 2월까지 진행된 미군의 공습으로 무너졌다. 1993년에 중국은 이 다리의 의미를 바꾸기 위해 단교(斷橋)에서 단교(端橋)로 이름을 바꾸었다. 단교는 끊어져 사람들의 움직임이 없지만 옆 철교는 가운데 기찻길을 두고 양 옆으로 도로가 있어 여전히 북중 물동량 이동의 중심이다.    사실 단둥 시내에는 그다지 인상적인 여행지가 없다. 시내에서 시간이 난다면 시내 중심에 있는 진지앙산(錦江山)의 정상에 있는 캉메이위앤차오지니엔관(抗美援朝紀念館)과 후산창청(虎山長城)정도다.    후산창청(虎山長城)은 과거 고구려의 말단 성이었는데, 마치 창청의 동쪽 끝인양 만들어 역사 조작의 냄새가 난다.   중국의 관점에서 한국전쟁을 해석한 만큼 객관적인 역사교육의 현장이지만 반공교육에 익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낯선 곳이다. 53m의 기념탑과 직경 44m의 원형 극장이 인상적이다. 후산창청은 과거 고구려의 말단 성이었는데, 마치 창청의 동쪽 끝인양 만들어 역사 조작의 냄새가 난다.    여행지로 정비되지 않았지만 역사 마니아라면 우리 사신이 중국으로 넘어올 때 건너던 지우롄청(九連城)도 한번 둘러볼 일이다. 그밖에 단둥에서 좀 거리가 있지만 펑황산(鳳凰山 봉황산)은 고구려의 중요 성 가운데 하나여서 둘러볼 만 하다. 좀 멀지만 남서향으로는 칭산거우(靑山溝 청산구)가 있는데, 북방의 ‘계림(桂林)’으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여행지다. 사실 단둥은 여전히 들떠있다. 남북간 기차가 연결되고 중국까지 이어지면 이곳은 동북아 물류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큰 도시다. 물류는 물론이고 일본, 한국, 북한, 중국으로 이어지는 여행 등 문화교류의 교두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궁 같은 북한을 놓고 벌이는 동아시아 역학 관계의 실타래는 좀처럼 풀리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단둥은 여전히 가장 빠른 개발도시 가운데 하나다. 중국으로서는 뭔가 확신이 없다면 이런 개발이 어려울텐데 그 자신감이 때로는 부담스럽다.    글=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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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기전에 가야할 중국 여행지
    2020-03-31
  • 동북 지역-우리 민족의 숨결이 느껴지는 백두산 일대
    통화에서 백두산까지는 원래 밤기차가 가장 좋은 교통 수단이었다. 밤에 기차에 올라 잠을 자면 아침에 바이허(白河)역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백두산 입구 산문 하지만 최근에 서파(西坡) 등이 개발되면서 송지앙허(松江河)도 여행 중심지가 됐다. 송지앙허에서 서파는 물론이고 새로 개발된 남파 등으로 가는 여행이 출발한다. 바이허와 송지앙허는 도로가 개통하면서 2시간이면 닿는다.    필자는 다섯 차례 백두산에 가봤다. 대부분 여름이었다. 백두산에 가면서는 우리 민족의 시원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돌이키게 된다. 실제로 백두산을 비롯한 동북 지방의 자연은 우리와 정말 닮아 있어 다른 땅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나야 하는 것은 동북공정이나 백두산 공항 건설처럼 백두산을 창바이산(長白山)으로 만들고자 하는 중국의 다양한 의도나 여행지로 돈을 벌겠다는 의지뿐이다.    이제는 공식적으로 금지된 서파 산행도 있고, 북한쪽 코스도 개발된다지만 조금만 코스를 바꾸어도 백두산 여행은 풍성해질 수 있다. 우선 원시산림으로 불리는 숲 트레킹은 길게 잡으면 두 시간 정도를 숲길을 따라 다녀오는 코스다.  백두산 원시산림  백두산의 숲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므로 조심히 걸으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좋다. 산문을 나와 오른쪽으로 가면 나오는 두만강 발원지, 숭선세관을 지나 허롱(和龍)을 거처 옌지로 가는 길도 두강강의 물줄기를 즐겁게 느낄 수 있는 코스다.    옌지는 200만 조선족의 수도와 같다. 조선족에 의해 행정이 이루어지던 자치주의 중심도시이자 문화, 교육의 중심도시였다. 중국 조선 문화를 만든 데 가장 중심 인물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주덕해 선생이다.    사실 이제 조선족 청소년 사이에서조차 그의 이름을 듣기 쉽지 않은데, 그는 동북에서 항일 운동을 하다가 러시아로 건너가 교육을 받고 와서 옌안에 간다.    그곳에서 탁월한 지도력으로 농업 등에 공을 세우고, 마오는 물론이고 저우언라이와 깊은 친분 관계를 가졌다. 중국에 남은 주덕해는 옌볜 자치주를 만들고, 지금도 중국 유수 대학에 꼽히는 옌볜대학의 전신을 만들고, 소수민족예술단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옌볜 가무단을 만든 인물이다.    그는 문화대혁명 때 저우언라이의 배려로 후베이로 내려가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쓸쓸한 최후를 맞는다. 그의 흔적은 이제 옌볜대학의 뒤에 있는 기념비에서 만날 수 있지만 그곳을 찾는 이들이 많지 않고, 인구의 급속한 감소로 자치주마저 위협다는 상황이라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곳은 100여 년 전 동북 항일운동의 중심지라 그 느낌도 애틋하다. 윤동주, 함석헌, 문익환 등이 공부했던 대성중학의 유적이나 이제는 사라진 선조들의 문화가 살아 있는 옌지의 시장을 돌아보는 것도 독특한 느낌이다. 하지만 백두산 여행이 개방되면서 이곳은 급속히 시장화의 급랑을 타고 있다.    글 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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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기전에 가야할 중국 여행지
    2020-03-30
  • 동북 지역-압록강 따라 민족의 시원을 더듬다
    압록강은 북한과 중국의 경계를 따라 흘러 내려온다. 필자는 그 강의 대여섯 곳에서 물에 손을 담가 봤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차가운 느낌은 덜하다.    압록강 단교 하지만 물을 담글 때마다 아주 오래전 마을 중앙에 있는 느티나무 가운데 난 옹이 안에 손을 넣는 느낌이다. 수백 년 된 구렁이가 내 작은 손을 콱 물어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 아마 우리 민족의 시원(始原)으로 생각해서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한강, 금강, 대동강 등 한반도를 관통하는 많은 강이 있지만 압록강이 주는 단어의 느낌이 남다른 것은 나만일까. 다른 강들보다는 더욱 푸르고 기운찰 거라는 느낌...    공식적인 압록강 발원지는 함남 풍산군과 신흥군(현 양강 김형권군과 함남 신흥군) 경계에 있는 명당봉(1809m)이다. 반면에 두만강 발원지는 백두산 북쪽 사면에 있는 작은 냇가다.    백두산 산문에서 숭선세관에 가는 길에 있는 두만강 발원지는 불과 북한군 경계병과 1~2m를 두고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대학생이던 일행 중에 몇이 담배를 건너자 별 경계심 없이 받았다.    백두산을 기점으로 북으로는 두만강, 남으로는 압록강이 흘러간다. 그 경계선이 주는 함의는 이제 무겁다 못해 처절하다. 황석영의 <바리데기>에서 나온 순이처럼 많은 이들이 생사를 걸고 이 강을 건넌다.    압록강이 끝나는 곳이 단둥이다. 과거 이름은 안동(安東)이다. 중국이 이곳을 안동으로 부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제목처럼 이곳이 편안한 날이 되기를 기원하는 것일까. 역대로 우리 민족이 중원을 공격한 일이 거의 없으니 그런 소망도 없으련만 일제까지도 이곳의 이름은 안동이었다.    압록강 하구에 단둥의 고층아파트가 들어 서 있다 크게 본다면 우리 땅과 랴오닝 반도가 만든 단동 만을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동서의 차이다. 밤이 되면 동쪽 신의주는 정적에 쌓여서 칠흑같이 어두워진다.    반면에 서쪽인 중국의 단둥은 야간 조명은 물론이고 밤 공사로 훤하다. 과거 철교의 북쪽으로 나 있던 개발구는 남쪽으로 확장되어 새로운 신천지를 만들고 있다.    여행자들은 작은 모터보트에서 대형 유람선까지 다양한 배를 타고 북한 쪽으로 접근한다. 때론 철교 남쪽으로 가기도 하고 북쪽의 한적한 초소로도 갈 수 있다.    여행자들이 북한 쪽에 접근해 손을 흔들거나 말을 걸면 군인들은 대부분 외면하지만 일반인은 우리가 그들을 보듯이 그들 역시 우리를 본다. 물론 그쪽 사람은 거의 바뀌지 않음에 반해 중국 쪽에서 보는 사람은 매일매일 새로운 사람일 것이다.  압록강 하구 북한 주민 빨래를 하고 있다 간간이 써 있는 문구들을 읽으면서 생소한 모습으로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역사에 대한 비감함에 빠지기 십상이다. 북쪽으로는 이성계가 회군했다는 위화도가 있다.    압록강 하류에 있는 이곳을 보면 역사를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그때 이성계가 중원을 향해 진군했으면 어떤 결과가 빚어졌을까. 쉽게 답할 수 없지만 청나라처럼 중원을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히려 중국의 지배만을 확대하는 계기를 만들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든다.    압록강을 따라 북으로 오리는 길은 최근에 정비되어 길이 좋다. 강을 따라가는 길은 느낌이 좋다. 다만 수시로 스치는 북한 쪽의 헐벗은 모습은 행자를 슬프게 한다.    근대 최대의 수력발전소라는 수풍 발전소를 지나면 산지와 평지가 연속되는 지역이 펼쳐진다. 이곳들은 일제가 한국을 병합한 이후 우리 애국지사들이 피신 와서 독립 운동을 펼치던 곳이다.    압록강의 상류에는 고구려 중심도시였던 지안(集安)이 있다. 졸본성(지금의 환런 桓仁)에서 시작된 고구려는 비교적 안정된 지형인 지안으로 천도한다.    지안은 압록강이 있는 남쪽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고구려의 기상을 만난다.    광개토대왕릉비나 장수왕릉 등은 그다지 먼 거리에 있지 않다. 한적한 공간들을 움직이다 보면 역사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다.    점심 시간에 지안에 있다면 지안시를 통과하는 압록강 유람선 선착장 맞은편에 늘어선 불고기 집에서 이곳 특유의 불고기 맛을 봐도 좋다. 고기를 탄불에 굽고, 마늘 등을 넣은 소스에 고기를 찍어 먹는다. 소스는 화학조미료 맛이 강하지만 여행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지안에서 이곳의 교통 요지인 통화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 차가 가는 길은 과거 중국과 고구려의 연결 통로이기 때문에 전술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지금은 터널이 생겼지만 그 길에서 피 흘렸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숙연해진다.    글 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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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기전에 가야할 중국 여행지
    2020-03-30
  • 꿍거얼 초원-야생화 천국에서 새의 낙원
    꿍거얼 초원 홍산쥔마창에서 작은 길을 따라가면 몽골이 시작되는 고원이 나온다. 이 고원은 필자가 여행 다닌 중국의 경관 가운데 가장 편안했던 곳 가운데 하나다.    산의 등성이를 지나가며 차를 어디에 세워도 아름다운 야생화의 천국이다. 중간 중간에는 여유로운 몽골인들의 가옥이 펼쳐져 있다.    사진가들이 오면 수십 번을 세워 달라고 할 수 있는 곳이지만 우리는 그냥 바삐 길을 재촉했다.  그 길을 2시간쯤 달리면 꿍거얼 초원의 시작지인 커스커텅이 나온다.    제법 규모가 있는 군 정도의 도시다. 그 도시에서 북으로 달리면 오른쪽에는 훈찬타커 사막이 있고, 그 오른쪽에는 꿍거얼 초원이 펼쳐진다.   훈찬타커는 가장 사막화가 빨리 진행되는 곳으로 과거 우리나라에 황사 피해를 주지 않았지만 최근 빈번히 우리나라에 영향을 주는 곳이다. 듬성듬성 펼쳐지는 모래 등성이 사막화가 결코 멀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오른쪽은 초원이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그 중간을 가로지르는 양이나 말떼, 혹은 소떼들. 후허하오터에서 만나던 작은 초원이 아니라 대륙의 평온이 느껴지는 진짜 초원이다.    더욱이 고도가 올라가면서 펼쳐지는 초원의 다양한 풍경은 일행들을 새로운 세계로 이끄는 것 같다. 가끔씩 양떼에 눈을 돌릴 뿐 그들은 마치 샤먼이나 된 듯 자신을 초원에 던진다.    파오는 이동이 편리하도록 천이나 가죽, 나무로 만들어진다   꿍거얼 초원의 한가운데 바이인아오포(白音敖包)가 있다. 이곳은 파오로 만들어진 숙박 지역으로 뒤에는 세계에서도 드문 고산 삼나무 군락이 있다. 그 뒤로 가면 따싱안링(大興安嶺) 산맥이 펼쳐지는데, 이곳이 닥터 노먼 베쑨이 사망했던 곳이다.    파오는 몽골의 전통 주택이다. 이동이 편리하도록 천이나 가죽, 나무로 만들어진다. 칭기즈칸은 이 편리한 주택과 멀리서도 눈에 띄는 아오포(敖包)를 바탕으로 유럽까지 자신의 손 안에 넣었다.    초원의 아침은 역시 청신하다. 일찍 잠에서 깨어 세계에서도 드물게 초원지대에 형성됐다는 삼나무 군락을 살펴본다. 그 군락으로 가는 길에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에서 보이는 것처럼 쓸쓸히 죽어 있는 나무를 만난다. 자신의 뿌리에 있는 흙마저도 몰아가버린 바람의 비정 때문에 나무는 말라 죽었다.    사실 우리들은 지금 소비라는 바람을 통해 지구의 뿌리마저 위협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 소비의 바람은 우리는 물론이고 이제 중국을 광풍처럼 휩쓸고 있다.    꿍거얼에서 씨린하오터(錫林好特)로 가는 길목에 있는 타리후가 있다. 드넓은 초원, 또 1200m의 고도에 만들어진 호수의 모습은 잿빛이다.    네이멍구 4대 호수 중 하나인 타리후 영(靈)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한 번쯤 들렀다 가고픈 곳 같다. 드물게 새들이 날아 멀리서 온 객을 맞아준다. 새들의 낙원(百鳥樂園)은 40㎡의 드넓은 호수에 백조를 비롯해  홍학, 회학, 큰 기러기 등이 노니는 곳이고, 그 신령함 때문에 매년 4월 18일에는 용왕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네이멍구 4대 호수가운데 하나이자, 지앙시 포양후, 바인부르커후와 더불어 중국 3대 백조 호수로 꼽힌다. 호수 입구에는 휴양촌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을 통해 주변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몽골족은 유목 민족이다. 유랑 생활을 하기 때문에 고대의 몽골족은 집을 짓고 허무는 것을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이동할 수 있는 집을 발명했는데, 이를 ‘멍구파오’라고 한다. ‘파오’(包)는 만족어에서 온 것이고, ‘집’이라는 뜻이다. 나따무는 몽골어로 ‘오락’ 혹은 ‘유희’라는 뜻이다. 이것은 몽골족들의 성대한 전통 명절인데, 일반적으로 7∼8월 사이에 진행된다. 그날은 유목민이 전통 의상을 입고 말 혹은 차를 타고 사면팔방에서 모여든다.  씨름은 유목민이 가장 즐기는 체육 항목 중의 하나이다. 몽골식의 씨름은 연령과 체중을 가리지 않는다. 시합이 시작되면 씨름 선수들은 웅장한 도전 음악 소리 속에서 씩씩하게 나선다. 선수가 등장해서 서로 싸우다가 무릎이 땅에 닿은 사람이 패한 것이다.    활쏘기도 몽골족이 즐기는 체육 항목 중의 하나이다. 찡써(靜射)와 치써(騎射) 두 가지로 나누는데, 찡써는 땅에서 쏘는 것이고 치써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쏘는 것이다.   마토우진(馬頭琴)은 몽골족의 수많은 악기 중 가장 민족 특색이 풍부한 악기로, 말의 머리처럼 생겼다. 그래서 ‘마토우진’이란 이름을 가졌다고 한다. 마토우진의 선율은 은은하고 음색은 넓고 아름다워 초원의 은은함과 어우러짐이 있다.   글 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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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27
  • 만리장성...지구 밖에서도 골라보는 재미가 있다
      10년 가까이를 살았지만 베이징의 한여름을 나기는 쉽지 않다. 40도까지 수은주로 오르는 고온도 고온이지만 인공비로 인해 습도도 높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나았겠지만 과거라고 다를 리 없다. 그래서 황제들은 이허위안(颐和园)이나 위앤밍위안(圓明園) 등을 세우고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려 했다. 그런데 사실상 지금의 중국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강희제(재위 1661∼1722)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휴가지를 만들었다.    바로 열하(熱河 현지명 청더 承德)다. 베이징에서 청더까지는 기찻길로 256km다. 말을 타고 달리면 하루면 닿겠지만 황제의 행렬은 가마로 서서히 그곳을 향했다.   굳이 바삐 달릴 일은 없으니 그 길을 천천히 감상하면서 가보자. 사실 황제가 그 길을 향하면 길에는 약 50m 간격으로 공연을 벌였다고 한다. 황제가 아니니 곳곳에서 그런 공연을 기대할 수 없지만 대신에 중앙선을 추월선으로 삼는 중국 운전사들의 곡예와 같은 운전 실력을 감상하면 흥미 만점이다.   만리장성   이 길은 〈열하일기〉에서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일야구도하기’와 ‘야출고북구기’ 등이 나온 곳이다. 당시 연암 일행은 황제가 수일 내로 당도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폭우로 강물이 넘실대는 이 길을 건너서 열하를 향했다.    이제는 고속도로가 뚫려서 청더 가는 길에 중간 도시인 미윈(密雲)까지는 한 시간 정도면 갈 수 있다. 미윈부터는 다시 국도를 타고 베이징 등 화베이 지방의 북쪽 방벽 역할을 하는 옌산(燕山) 산맥을 지나야 한다.    만리장성은 한족들이 북쪽에서 내려오는 기마민족을 쌓기 위해 만든 보호막이다. 열하로 가는 길에 가장 통과하기 쉬운 길이 구베이코우(古北口)다. 구(口)는 말 그대로 만리장성의 노선 가운데 지대가 낮아서 관문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고북구 장성   중국 역사에 밝았던 연암 박지원은 이것을 지나면서 열하일기 가운데서도 최고의 문장이라는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밤에 고북구 장성을 지나며)’를 썼다.   과거 수없는 전장이었던 그곳을 조선의 선비가 지난다는 것에 연암은 무척이나 가슴 뿌듯했고, 장성의 한 돌에 자신이 지나갔다는 글을 쓰고 스스로도 문장을 지었던 것이다.    보통 베이징 여행때 가는 만리장성은 베이징의 정북에 있는 빠다링(八達嶺) 장성이다. 시내에서 한 시간 남짓에 도착해서 많이 가지만 장성의 옛 모습은 없고, 장삿속만 보이는 장성이 빠다링 장성인데 구베이코우 장성의 인근에는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장성의 웅장함을 엿볼 수 있는 장성들이 산재해 있다.    동쪽에서 쓰마타이(司馬臺) 장성을 시작으로 진산링(金山嶺) 장성, 구베이코우 장성, 무톈위(慕田峪) 장성, 황화청(黃花城) 장성 등이 차례대로 이어져 있다.   이 장성들은 모두 각기 다른 역사와 특색을 갖고 있다. 현대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창청을 보고 싶은 이가 있다면 쓰마타이창청을 권한다.    쓰마타이(司馬臺) 장성 이곳은 만리장성의 모든 특징을 한 곳에 모아 놓은 듯하여 ‘장성 박물관’이라고도 한다. 장성(長城)은 중국 건축물의 최고로 꼽히며, 이 중 쓰마타이창청은 중국 장성의 최고로 손꼽힌다는 말이 있다.    쓰마타이창청의 가장 험한 곳은 ‘시엔뉘로우’(仙女樓)와 ‘왕징로우(望京樓)’로 통하는 길목이다. 높이가 100여m에 이르며, 경사도는 85°로 거의 수직이며 유일한 길목이다. 계단이 발 하나 간신히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좁고 작으며, 양쪽으로 가파른 절벽을 이루고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진산링 장성 쓰마타이가 장성 건축의 다양한 면모를 갖고 있다면 진산링 장성은 ‘만리장성 금산독수(萬里長城 金山獨秀 만리장성 가운데 금산령이 으뜸이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웅장한 모습이 특징이다. 2인용 작은 케이블카로 올라간 후 5분쯤 걸으면 만리장성이 나타나는데, 곳곳에서 감탄을 자아내는 명승이 펼쳐진다.   동쪽으로 이어진 장성은 이번에는 구베이코우에 닿는다. 구베이코우 장성은 낮은 지역에 있어서 웅장함은 없지만 관문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지금은 황제들이 다니던 여정들을 전시한 문화관이 만들어져 여행자를 맞는다.   구베이코우를 지난 장성은 서쪽으로 흘러가 무톈위 장성이 된다. 무톈위 장성은 여러 가지 장성의 특색을 모은 곳이다. 베이징 시내에서도 비교적 접근도가 좋은 곳이다. 올라갈 때는 케이블카로 올라가 내려올 때는 화다오(滑道 철판 봅슬레이)를 타고 내려오면 스릴 만점의 여행이 될 수 있다.   글=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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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기전에 가야할 중국 여행지
    2020-03-25

실시간 죽기전에 가야할 중국 여행지 기사

  • 지안-'동양의 피라미드' 고구려 유적을 만나다
    단둥에서 압록강을 따라 새로 난 길을 6시간쯤 타고 가거나, 선양에서 남만주를 가로지르는 도로로 8시간쯤 동진하면 지안(集安)에 닿는다.    동북지방은 고구려가 처음 도읍했던 도시이자 간도협약 이전엔 우리나라 영토였던 곳이다. 고구려 유적은 우리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곳이다.    그런데 2003년 후반기에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억지 시도를 하면서 한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고구려 유적의 중심지는 압록강변에 있는 지안(集安)이다. 이곳에는 광개토대왕릉비를 비롯해 장군총, 환도성 유적 등 각종 유적이 적지 않다. 원래 고구려는 졸본(현재 환런 桓仁)에 나라를 세웠다.  지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하지만 이곳은 산이 너무 높고 험해 외적의 침입을 막는 데 유리하지만 정치, 경제, 문화 측면에서 도읍지로는 적합하지 못했다. 특히 주변 여러 부족국가들이 강성해지면서 ‘졸본’은 도읍지로 구실을 제대로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지안이었고 유리왕 22년에 천도하게 된다. 지안은 온난한 기후와 풍부한 물자를 가진 곳이었다. 이곳에서 고구려는 얼마간의 영화를 누렸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평양으로 천도하게 된다.    지안의 고구려 유적은 오랫동안 잘 관리되어 오지 못했다. 특히 공산화 이후에 국경 문제를 부담스러워한 중국은 고구려에 대한 우리나라의 관심 자체를 차단하기 위해 적지 않은 공을 들였다. 최근에 역사 문제가 불거지면서 취재 등을 위해 지안을 방문하는 것을 막는 등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지안에서 우선 꼭 들를 곳은 장수왕릉(長壽王陵)이다. 동양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장수왕릉은 장군총(將軍塚)으로 불렸다. 입구에 들어가면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독특한 돌로 쌓은 능의 전면이 보인다.    이 능은 화강암을 정성 들여 가공한 돌로 일곱 층으로 쌓았다. 학계에 따르면 장수왕릉의 방식인 돌무지돌방무덤(積石石室墓)은 대체로 3세기 말∼4세기 초로부터 5세기에 나타나며, 기와를 통해서는 4세기 중엽 이후 5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므로 이 장군총의 연대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추정할 경우 무덤의 주인은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5~413)이나 장수왕(長壽王 394~491) 중의 하나로 본다.   장군총  장수왕릉의 아래에 광개토대왕릉비 및 호태왕릉이 있다. 아버지의 묘가 아들인 장수왕릉의 묘 보다 약간 낮은 곳에 위치해 의심을 받지만 광개토대왕릉비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가장 소중한 자료이자 또 비문의 해석으로 뜨거운 감자가 돼 온 유적이다.    이 비는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長壽王)이 왕 3년(414년)에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당시 수도였던 압록강 유역인 중국 길림성 통화전구 집안현 통구성(吉林省 通化專區 輯/集安縣 通溝城 - 중국 현지에서는 集安縣)에서 동북쪽 약 4.5km 지점의 태왕촌(太王村)에 있다. 비는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의 사면석이나 자연스러운 모습의 긴 바위 모습이다.    태왕릉비   그곳에 처음 들렀을 때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시작되기 이전인 2002년이었다. 중국 내부에서는 이미 동북공정이 한참 준비되어 일체의 동영상 촬영이 금지되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후 광개토대왕릉비는 유리로 된 보호망이 만들어지는 등 곡절을 거쳤다. 근대에 들어서 일본에 의해 비문이 훼손되고, 지금은 중국에 의해 수난당하는 유산을 보는 것은 씁쓸하다.    사실 그 땅에 존재했던 어떤 권력자도 100여년 넘기기 힘든 것을 봐왔던 비석이다. 자신이 주인인양 비문을 훼손하고 곡해하는 후손을 보는 느낌은 씁쓸하기 그지 없을 것 같다.   지안 시내 곳곳에는 국내성의 흔적이 있다. 또 시의 동쪽인 압록강인데 보트 등을 통해 북한 쪽에 접근할 수 있다. 도시의 서북향에는 환도산성이 있다. 과거 관구검이 넘어와 고구려를 위기에 빠뜨린 곳이다. 산성은 복원되어 있는데 성의 면모는 거의 없다. 성 아래에는 고구려 무덤의 집합군인 산성하 무덤군이 있다. 크고 작은 묘들은 과거 고구려의 영화를 한눈에 느낄 수 있게 한다.     글 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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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기전에 가야할 중국 여행지
    2020-03-31
  • 단둥-한북중이 만나는 동아시아 바로미터
    아마 지금 지구상에 이런 느낌을 주는 장소가 많지 않을 것이다. 낮에 강 위에서 서서 동쪽은 보면 낡은 인민복과 건물들이 마치 1950년대 어느 도시를 연상시킨다.   단둥 시장    반면에 서쪽을 보면 일년도 되지 않아서 스카이라인이 바뀌고, 도시 남북에 신도시들이 생겨난다. 아마 이런 분위기가 가장 생경한 이들이 동쪽에 사는 북한 신의주 사람들일 것이다.  그 도시가 바로 단둥이다. 단둥은 압록강과 신의주를 볼 수 있는 곳이어서 우리나라 여행객들에게는 독특한 감회를 주는 도시다. 1907년 청나라는 이곳을 무역항으로 개방했고, 압록강을 타고 온 물자나 지린성 등지에서 물자들이 모이는 중요한 항구 기능을 하고 있다.    단둥 자체의 여행에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시 중심에서 10분 정도만 걸으면 압록강에 닿을 만큼 가깝다. 유람선을 타고 강 중심으로 갈 수 있는데, 이곳에서 북한 신의주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우선 이곳에 가면 압록강 단교(鴨綠江 端橋)를 만날 일이다. 1911년 10월에 완공된 다리였는데, 1950년 11월부터 1951년 2월까지 진행된 미군의 공습으로 무너졌다. 1993년에 중국은 이 다리의 의미를 바꾸기 위해 단교(斷橋)에서 단교(端橋)로 이름을 바꾸었다. 단교는 끊어져 사람들의 움직임이 없지만 옆 철교는 가운데 기찻길을 두고 양 옆으로 도로가 있어 여전히 북중 물동량 이동의 중심이다.    사실 단둥 시내에는 그다지 인상적인 여행지가 없다. 시내에서 시간이 난다면 시내 중심에 있는 진지앙산(錦江山)의 정상에 있는 캉메이위앤차오지니엔관(抗美援朝紀念館)과 후산창청(虎山長城)정도다.    후산창청(虎山長城)은 과거 고구려의 말단 성이었는데, 마치 창청의 동쪽 끝인양 만들어 역사 조작의 냄새가 난다.   중국의 관점에서 한국전쟁을 해석한 만큼 객관적인 역사교육의 현장이지만 반공교육에 익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낯선 곳이다. 53m의 기념탑과 직경 44m의 원형 극장이 인상적이다. 후산창청은 과거 고구려의 말단 성이었는데, 마치 창청의 동쪽 끝인양 만들어 역사 조작의 냄새가 난다.    여행지로 정비되지 않았지만 역사 마니아라면 우리 사신이 중국으로 넘어올 때 건너던 지우롄청(九連城)도 한번 둘러볼 일이다. 그밖에 단둥에서 좀 거리가 있지만 펑황산(鳳凰山 봉황산)은 고구려의 중요 성 가운데 하나여서 둘러볼 만 하다. 좀 멀지만 남서향으로는 칭산거우(靑山溝 청산구)가 있는데, 북방의 ‘계림(桂林)’으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여행지다. 사실 단둥은 여전히 들떠있다. 남북간 기차가 연결되고 중국까지 이어지면 이곳은 동북아 물류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큰 도시다. 물류는 물론이고 일본, 한국, 북한, 중국으로 이어지는 여행 등 문화교류의 교두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궁 같은 북한을 놓고 벌이는 동아시아 역학 관계의 실타래는 좀처럼 풀리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단둥은 여전히 가장 빠른 개발도시 가운데 하나다. 중국으로서는 뭔가 확신이 없다면 이런 개발이 어려울텐데 그 자신감이 때로는 부담스럽다.    글=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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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기전에 가야할 중국 여행지
    2020-03-31
  • 동북 지역-우리 민족의 숨결이 느껴지는 백두산 일대
    통화에서 백두산까지는 원래 밤기차가 가장 좋은 교통 수단이었다. 밤에 기차에 올라 잠을 자면 아침에 바이허(白河)역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백두산 입구 산문 하지만 최근에 서파(西坡) 등이 개발되면서 송지앙허(松江河)도 여행 중심지가 됐다. 송지앙허에서 서파는 물론이고 새로 개발된 남파 등으로 가는 여행이 출발한다. 바이허와 송지앙허는 도로가 개통하면서 2시간이면 닿는다.    필자는 다섯 차례 백두산에 가봤다. 대부분 여름이었다. 백두산에 가면서는 우리 민족의 시원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돌이키게 된다. 실제로 백두산을 비롯한 동북 지방의 자연은 우리와 정말 닮아 있어 다른 땅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나야 하는 것은 동북공정이나 백두산 공항 건설처럼 백두산을 창바이산(長白山)으로 만들고자 하는 중국의 다양한 의도나 여행지로 돈을 벌겠다는 의지뿐이다.    이제는 공식적으로 금지된 서파 산행도 있고, 북한쪽 코스도 개발된다지만 조금만 코스를 바꾸어도 백두산 여행은 풍성해질 수 있다. 우선 원시산림으로 불리는 숲 트레킹은 길게 잡으면 두 시간 정도를 숲길을 따라 다녀오는 코스다.  백두산 원시산림  백두산의 숲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므로 조심히 걸으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좋다. 산문을 나와 오른쪽으로 가면 나오는 두만강 발원지, 숭선세관을 지나 허롱(和龍)을 거처 옌지로 가는 길도 두강강의 물줄기를 즐겁게 느낄 수 있는 코스다.    옌지는 200만 조선족의 수도와 같다. 조선족에 의해 행정이 이루어지던 자치주의 중심도시이자 문화, 교육의 중심도시였다. 중국 조선 문화를 만든 데 가장 중심 인물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주덕해 선생이다.    사실 이제 조선족 청소년 사이에서조차 그의 이름을 듣기 쉽지 않은데, 그는 동북에서 항일 운동을 하다가 러시아로 건너가 교육을 받고 와서 옌안에 간다.    그곳에서 탁월한 지도력으로 농업 등에 공을 세우고, 마오는 물론이고 저우언라이와 깊은 친분 관계를 가졌다. 중국에 남은 주덕해는 옌볜 자치주를 만들고, 지금도 중국 유수 대학에 꼽히는 옌볜대학의 전신을 만들고, 소수민족예술단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옌볜 가무단을 만든 인물이다.    그는 문화대혁명 때 저우언라이의 배려로 후베이로 내려가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쓸쓸한 최후를 맞는다. 그의 흔적은 이제 옌볜대학의 뒤에 있는 기념비에서 만날 수 있지만 그곳을 찾는 이들이 많지 않고, 인구의 급속한 감소로 자치주마저 위협다는 상황이라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곳은 100여 년 전 동북 항일운동의 중심지라 그 느낌도 애틋하다. 윤동주, 함석헌, 문익환 등이 공부했던 대성중학의 유적이나 이제는 사라진 선조들의 문화가 살아 있는 옌지의 시장을 돌아보는 것도 독특한 느낌이다. 하지만 백두산 여행이 개방되면서 이곳은 급속히 시장화의 급랑을 타고 있다.    글 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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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기전에 가야할 중국 여행지
    2020-03-30
  • 동북 지역-압록강 따라 민족의 시원을 더듬다
    압록강은 북한과 중국의 경계를 따라 흘러 내려온다. 필자는 그 강의 대여섯 곳에서 물에 손을 담가 봤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차가운 느낌은 덜하다.    압록강 단교 하지만 물을 담글 때마다 아주 오래전 마을 중앙에 있는 느티나무 가운데 난 옹이 안에 손을 넣는 느낌이다. 수백 년 된 구렁이가 내 작은 손을 콱 물어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 아마 우리 민족의 시원(始原)으로 생각해서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한강, 금강, 대동강 등 한반도를 관통하는 많은 강이 있지만 압록강이 주는 단어의 느낌이 남다른 것은 나만일까. 다른 강들보다는 더욱 푸르고 기운찰 거라는 느낌...    공식적인 압록강 발원지는 함남 풍산군과 신흥군(현 양강 김형권군과 함남 신흥군) 경계에 있는 명당봉(1809m)이다. 반면에 두만강 발원지는 백두산 북쪽 사면에 있는 작은 냇가다.    백두산 산문에서 숭선세관에 가는 길에 있는 두만강 발원지는 불과 북한군 경계병과 1~2m를 두고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대학생이던 일행 중에 몇이 담배를 건너자 별 경계심 없이 받았다.    백두산을 기점으로 북으로는 두만강, 남으로는 압록강이 흘러간다. 그 경계선이 주는 함의는 이제 무겁다 못해 처절하다. 황석영의 <바리데기>에서 나온 순이처럼 많은 이들이 생사를 걸고 이 강을 건넌다.    압록강이 끝나는 곳이 단둥이다. 과거 이름은 안동(安東)이다. 중국이 이곳을 안동으로 부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제목처럼 이곳이 편안한 날이 되기를 기원하는 것일까. 역대로 우리 민족이 중원을 공격한 일이 거의 없으니 그런 소망도 없으련만 일제까지도 이곳의 이름은 안동이었다.    압록강 하구에 단둥의 고층아파트가 들어 서 있다 크게 본다면 우리 땅과 랴오닝 반도가 만든 단동 만을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동서의 차이다. 밤이 되면 동쪽 신의주는 정적에 쌓여서 칠흑같이 어두워진다.    반면에 서쪽인 중국의 단둥은 야간 조명은 물론이고 밤 공사로 훤하다. 과거 철교의 북쪽으로 나 있던 개발구는 남쪽으로 확장되어 새로운 신천지를 만들고 있다.    여행자들은 작은 모터보트에서 대형 유람선까지 다양한 배를 타고 북한 쪽으로 접근한다. 때론 철교 남쪽으로 가기도 하고 북쪽의 한적한 초소로도 갈 수 있다.    여행자들이 북한 쪽에 접근해 손을 흔들거나 말을 걸면 군인들은 대부분 외면하지만 일반인은 우리가 그들을 보듯이 그들 역시 우리를 본다. 물론 그쪽 사람은 거의 바뀌지 않음에 반해 중국 쪽에서 보는 사람은 매일매일 새로운 사람일 것이다.  압록강 하구 북한 주민 빨래를 하고 있다 간간이 써 있는 문구들을 읽으면서 생소한 모습으로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역사에 대한 비감함에 빠지기 십상이다. 북쪽으로는 이성계가 회군했다는 위화도가 있다.    압록강 하류에 있는 이곳을 보면 역사를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그때 이성계가 중원을 향해 진군했으면 어떤 결과가 빚어졌을까. 쉽게 답할 수 없지만 청나라처럼 중원을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히려 중국의 지배만을 확대하는 계기를 만들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든다.    압록강을 따라 북으로 오리는 길은 최근에 정비되어 길이 좋다. 강을 따라가는 길은 느낌이 좋다. 다만 수시로 스치는 북한 쪽의 헐벗은 모습은 행자를 슬프게 한다.    근대 최대의 수력발전소라는 수풍 발전소를 지나면 산지와 평지가 연속되는 지역이 펼쳐진다. 이곳들은 일제가 한국을 병합한 이후 우리 애국지사들이 피신 와서 독립 운동을 펼치던 곳이다.    압록강의 상류에는 고구려 중심도시였던 지안(集安)이 있다. 졸본성(지금의 환런 桓仁)에서 시작된 고구려는 비교적 안정된 지형인 지안으로 천도한다.    지안은 압록강이 있는 남쪽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고구려의 기상을 만난다.    광개토대왕릉비나 장수왕릉 등은 그다지 먼 거리에 있지 않다. 한적한 공간들을 움직이다 보면 역사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다.    점심 시간에 지안에 있다면 지안시를 통과하는 압록강 유람선 선착장 맞은편에 늘어선 불고기 집에서 이곳 특유의 불고기 맛을 봐도 좋다. 고기를 탄불에 굽고, 마늘 등을 넣은 소스에 고기를 찍어 먹는다. 소스는 화학조미료 맛이 강하지만 여행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지안에서 이곳의 교통 요지인 통화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 차가 가는 길은 과거 중국과 고구려의 연결 통로이기 때문에 전술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지금은 터널이 생겼지만 그 길에서 피 흘렸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숙연해진다.    글 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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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기전에 가야할 중국 여행지
    2020-03-30
  • 꿍거얼 초원-야생화 천국에서 새의 낙원
    꿍거얼 초원 홍산쥔마창에서 작은 길을 따라가면 몽골이 시작되는 고원이 나온다. 이 고원은 필자가 여행 다닌 중국의 경관 가운데 가장 편안했던 곳 가운데 하나다.    산의 등성이를 지나가며 차를 어디에 세워도 아름다운 야생화의 천국이다. 중간 중간에는 여유로운 몽골인들의 가옥이 펼쳐져 있다.    사진가들이 오면 수십 번을 세워 달라고 할 수 있는 곳이지만 우리는 그냥 바삐 길을 재촉했다.  그 길을 2시간쯤 달리면 꿍거얼 초원의 시작지인 커스커텅이 나온다.    제법 규모가 있는 군 정도의 도시다. 그 도시에서 북으로 달리면 오른쪽에는 훈찬타커 사막이 있고, 그 오른쪽에는 꿍거얼 초원이 펼쳐진다.   훈찬타커는 가장 사막화가 빨리 진행되는 곳으로 과거 우리나라에 황사 피해를 주지 않았지만 최근 빈번히 우리나라에 영향을 주는 곳이다. 듬성듬성 펼쳐지는 모래 등성이 사막화가 결코 멀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오른쪽은 초원이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그 중간을 가로지르는 양이나 말떼, 혹은 소떼들. 후허하오터에서 만나던 작은 초원이 아니라 대륙의 평온이 느껴지는 진짜 초원이다.    더욱이 고도가 올라가면서 펼쳐지는 초원의 다양한 풍경은 일행들을 새로운 세계로 이끄는 것 같다. 가끔씩 양떼에 눈을 돌릴 뿐 그들은 마치 샤먼이나 된 듯 자신을 초원에 던진다.    파오는 이동이 편리하도록 천이나 가죽, 나무로 만들어진다   꿍거얼 초원의 한가운데 바이인아오포(白音敖包)가 있다. 이곳은 파오로 만들어진 숙박 지역으로 뒤에는 세계에서도 드문 고산 삼나무 군락이 있다. 그 뒤로 가면 따싱안링(大興安嶺) 산맥이 펼쳐지는데, 이곳이 닥터 노먼 베쑨이 사망했던 곳이다.    파오는 몽골의 전통 주택이다. 이동이 편리하도록 천이나 가죽, 나무로 만들어진다. 칭기즈칸은 이 편리한 주택과 멀리서도 눈에 띄는 아오포(敖包)를 바탕으로 유럽까지 자신의 손 안에 넣었다.    초원의 아침은 역시 청신하다. 일찍 잠에서 깨어 세계에서도 드물게 초원지대에 형성됐다는 삼나무 군락을 살펴본다. 그 군락으로 가는 길에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에서 보이는 것처럼 쓸쓸히 죽어 있는 나무를 만난다. 자신의 뿌리에 있는 흙마저도 몰아가버린 바람의 비정 때문에 나무는 말라 죽었다.    사실 우리들은 지금 소비라는 바람을 통해 지구의 뿌리마저 위협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 소비의 바람은 우리는 물론이고 이제 중국을 광풍처럼 휩쓸고 있다.    꿍거얼에서 씨린하오터(錫林好特)로 가는 길목에 있는 타리후가 있다. 드넓은 초원, 또 1200m의 고도에 만들어진 호수의 모습은 잿빛이다.    네이멍구 4대 호수 중 하나인 타리후 영(靈)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한 번쯤 들렀다 가고픈 곳 같다. 드물게 새들이 날아 멀리서 온 객을 맞아준다. 새들의 낙원(百鳥樂園)은 40㎡의 드넓은 호수에 백조를 비롯해  홍학, 회학, 큰 기러기 등이 노니는 곳이고, 그 신령함 때문에 매년 4월 18일에는 용왕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네이멍구 4대 호수가운데 하나이자, 지앙시 포양후, 바인부르커후와 더불어 중국 3대 백조 호수로 꼽힌다. 호수 입구에는 휴양촌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을 통해 주변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몽골족은 유목 민족이다. 유랑 생활을 하기 때문에 고대의 몽골족은 집을 짓고 허무는 것을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이동할 수 있는 집을 발명했는데, 이를 ‘멍구파오’라고 한다. ‘파오’(包)는 만족어에서 온 것이고, ‘집’이라는 뜻이다. 나따무는 몽골어로 ‘오락’ 혹은 ‘유희’라는 뜻이다. 이것은 몽골족들의 성대한 전통 명절인데, 일반적으로 7∼8월 사이에 진행된다. 그날은 유목민이 전통 의상을 입고 말 혹은 차를 타고 사면팔방에서 모여든다.  씨름은 유목민이 가장 즐기는 체육 항목 중의 하나이다. 몽골식의 씨름은 연령과 체중을 가리지 않는다. 시합이 시작되면 씨름 선수들은 웅장한 도전 음악 소리 속에서 씩씩하게 나선다. 선수가 등장해서 서로 싸우다가 무릎이 땅에 닿은 사람이 패한 것이다.    활쏘기도 몽골족이 즐기는 체육 항목 중의 하나이다. 찡써(靜射)와 치써(騎射) 두 가지로 나누는데, 찡써는 땅에서 쏘는 것이고 치써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쏘는 것이다.   마토우진(馬頭琴)은 몽골족의 수많은 악기 중 가장 민족 특색이 풍부한 악기로, 말의 머리처럼 생겼다. 그래서 ‘마토우진’이란 이름을 가졌다고 한다. 마토우진의 선율은 은은하고 음색은 넓고 아름다워 초원의 은은함과 어우러짐이 있다.   글 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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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27
  • 무란웨이창-광활한 대륙과 초원의 내몽골
    중국 문화 저술가 위치우위의 <천년의 정원>에는 피슈산좡에 대한 묘사가 첫 부분을 장식한다. 특히 그가 인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청나라 황제들이 만리장성의 수리를 주장하는 주변의 요청을 거듭하고, 장성의 바깥인 청더에 별궁을 세운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강희제는 장성 수리에 반박하면서 “진이 장성을 축조한 이래, 한·당·송 역시 항상 수리를 하였는데, 그렇다고 어찌 당시인들 변방의 환난이 없었단 말인가?… 오직 덕을 쌓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국토 수호의 유일한 방법임을 알 수 있다. 백성의 마음이 기쁘면 나라의 근본을 얻게 될 것이니, 변경이 절로 굳건하게 될 것이다”는 논리로 장성 수리를 거절하는 한편 청더에 별궁을 세우고,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무란웨이창(木蘭圍場)을 설치한다.    무란웨이창으로 가는 길 무란웨이창은 사냥을 하는 한편 군대의 진을 연구하는 장소로 왕들에게 항상 연구하고, 신체를 단련하는 연습을 하는 장소다. 실제로 그와 옹정제, 건륭제로 이어지는 치세는 청나라가 중국의 대부분 지역을 통일하는 한편 경제·문화적으로도 가장 융성한 국가를 만들게 했다.    흔히 베이징에서는 빠상차오위앤으로도 불리는 무란웨이창은 청더에서 출발할 경우 3시간쯤 걸리는 웨이창셴(圍場縣)을 경유한다.    다시 이곳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달리면 앞서 보았던 모습과 달리 울창한 숲을 만나게 된다. 이곳이 현재 여행지로 개발된 무란웨이창의 시작이다. 대문을 통과하면 울창한 전나무나 낙엽송으로 된 숲이 펼쳐지고 산길을 오른다. 구절양장의 길을 지나면 정상부에 도착한다.    이 정상부에 〈황제의 딸〉의 촬영장인 위에량후(月亮湖)가 있다. 위에량후는 말을 탈 수 있는 시설부터 몽고빠오나 통나무집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호수에서는 조각배를 타거나 모터보트를 즐길 수 있다.    또 북방 삼림대의 시작인 백화나무 숲을 볼 수 있다. 다시 조금 가면 하산 길이 시작된다. 앞으로는 일망무제의 고산삼림대가 장관을 이룬다. 이 산 너머에 훈찬타커 사막이 있다.    만약 이 삼림대가 없었다면 베이징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 오는 황사량의 수십 퍼센트가 증가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방풍림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고마운 삼림대다.    언덕을 내려오면 아담한 평지가 펼쳐지고 거기에 여행자 지구가 형성되어 있다. 준4성급 호텔에서 몽골 파오까지 다양한 숙박 시설이 있는데, 밤이 되면 수많은 여행자들이 몰리는 곳이다.    이곳은 밤이 되어야 본모습이 드러난다. 이곳의 대형 파오들에서는 각기 특색을 갖춘 전통 공연이 식사와 함께 선보인다. 전통 몽골 공연에서 잡스러운 댄스파티까지 호텔마다 열리는 다양한 연회에 빠져보는 재미가 일품이다.    또 길거리에는 전통 몽골 술에 양이나 소를 바비큐하여 파는 이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술도 그 지방의 다양한 약초로 담은 술에서 양젖을 발효해서 만든 몽골식 바이주(白酒 빼갈)나 맥주까지 흥겨운 판이 벌어진다.      또 사방에 터지는 폭죽과 캠프파이어로 여행자들은 하나가 되기도 한다. 밤이면 반소매로는 버티기 어려울 만큼 시원한 날씨가 여행자들을 뼈 시린 피서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곳에서 10분만 새로 닦인 길을 따라 가면 작은 강이 나온다. 청더를 지나는 루완허의 발원지인데 이곳에서는 시시하지만 래프팅도 가능하다. 이 강을 지나면 네이멍구가 시작된다. 씁쓸하게 이 길목에서 입장료를 징수한다. 네이멍구로 들어서 얼마 가지 않으면 홍산쥔마창(紅山軍馬場)이 나온다.    이곳은 중국의 군대에서 쓰는 말을 기르고, 훈련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감탄하게 되는 것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초원형 산들이다. 평안한 풀들이 자라는 작은 산들은 여행자들에게 뛰어가고 싶게 하는 매력이 있다. 이곳에서 말을 타거나 4륜 바이크를 탈 수 있다.    말타기는 보통 한 시간에서 3시간 가량을 탈 수 있다. 한 시간을 타면 초원을 거닐다가 오고, 두 시간을 타면 아오빠오(몽골인들의 서낭당이자 신호대)가 있는 곳에 간다. 3시간이면 자작나무 숲을 다녀올 수 있다.      군마장을 나와 다시 길을 가면 일망무제의 초원이 펼쳐진다. 〈강희황제〉를 찍었던 촬영장도 있는데, 아름다운 몽고빠오와 초원이 잊을 수 없는 풍경을 만드는 곳이다.    무란웨이창은 청더에서 120km가량 떨어져 있다. 청더에서 갈 수 있지만 직접 가자면 스허잉(四合永) 역이 가깝다. 이곳에서 웨이장까지는 22km가량 떨어져 있어서 상대적으로 가깝다. 버스를 이용하려면 시즈먼장거리버스터미널(西直門長途客運站)에서 웨이장(圍場)행 버스가 많다.    글 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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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27
  • 와이빠먀오-황제의 별장을 둘러싼 마음의 안식처
    피슈산좡 주변에는 사원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와이빠먀오(外八廟)로 불린다. 가장 큰 곳은 푸투오종청지먀오(普陀宗乘之廟·보타종승지묘 일명 소포탈라궁)다.    멀리서 바라본 소포탈라궁 1767년(건륭 32년)부터 건립돼, 건륭제 60세 회갑(1771년)에 완공됐다. 이 건물은 건륭제 회갑 기념도 있지만, 티베트에 있는 달라이 라마 8세에 대한 경의가 포함되어 있다.    이미 티베트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륭제가 라마를 위해 지었다는 점은 언뜻 이해하기 힘들지만,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보면 건륭제의 달라이 라마에 대한 존경을 한눈에 알 수 있다. 1780년 이 사원의 건립에 맞추어 청더를 방문한 박지원 일행은 그들을 한꺼번에 관찰할 수 있었다.    오색 능단(두꺼운 비단과 얇은 비단) 폐백을 가지고 반선(판첸 라마)을 보도록 하였는데, 황제까지 노란 수건을 가지고 반선을 대하는 것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란다. 조선 사신은 서번(서쪽 오랑캐)에게 조아릴 수 없다고 버티다가 황제도 그런 예를 차리는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조아린다.    이 과정을 통해 박지원은 국제 정세가 이제 더 이상 중국만이 세계의 중심일 수 없고, 중국 변방에 위치한 나라라고 오랑캐로만 폄하하는 등 중심과 주변을 분리하는 절대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어느 곳이나 중심이고 또 주변일 수 있다는 융통성 있는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푸투오종청지먀오의 옆에 수미푸쇼우즈먀오(須텆福壽之廟·수미복수지묘)가 있다. 건륭제 45년에 창건했는데, 주된 목적인 건륭제의 생일을 맞아 이곳을 방문하는 판첸 라마 6세를 영접하기 위해 만들었다.    수미푸쇼우즈먀오 때문에 사원의 모양은 티베트 시카체(日喀則·르커저)를 모방했다. 건물의 구조는 푸투오종청지먀오와 비슷한데, 가장 큰 특징은 먀오까오주앙옌뎬(妙高莊嚴殿·묘고장엄전)이다.    이곳은 판첸 라마 6세가 머물면서 독경을 한 곳인데, 1층 중앙에는 석가모니상이 있고, 주변에는 라마의 보좌 등이 배치되어 있다. 두 사원에는 라일락을 비롯한 수많은 꽃들이 피어 있어 여유를 찾을 수 있다.  소포탈라궁 유리문 우리 여행자가 많이 머무는 왕징의 옆으로 징순루(京順路)가 지난다. 고속도로를 이용하지 않은 버스는 이곳을 통과하는데, 5분 정도의 간격으로 청더행 버스가 있다. 청더까지는 버스로 약 3시간 30분 걸린다. 우다코우 쪽에 묵는 이들은 시즈먼(西直門) 지하철에 있는 북경북역에서 2101/2108 열차를 타는 것이 편리하다.    청더의 숙박은 그다지 저렴하지 않다. 도착 후 호객인을 통해서 숙소를 찾을 수 있다. 수준 있는 호텔로는 텐보자르지우디엔(天寶假日酒店 TianBao Holiday Hotel)이나 푸닝스상거탕따지우디엔(普寧寺上客堂大酒店 Pu Ning Hotel) 등이 있다. 이 여행길은 제목처럼 마음의 안식처를 찾을 만한 곳으로 동행하면서 읽으면 좋은 책을 소개하자면 바로 본문에 자주 언급되었듯이 〈열하일기〉다. 열하일기에서 노마디즘 등의 정수를 뽑아내서 쓴 책으로 이 길의 해설서이자 여행을 통해 자신을 키우는 여정을 소개한 책이다.    좀 무겁다면 최근에 출간한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고미숙 저/아이세움 간),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고미숙 저/그린비 간)도 좋다. 〈열하의 피슈산좡〉이란 책은 중국의 문화 해설가 웨난이 펴낸 책으로 열하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전문적으로 풀어낸 책이다. 피슈산좡의 역사는 사실 강희제, 건륭제 등 중국 최고 황제들의 역사이니 만큼 중국 역사의 최절정을 느끼는 흥미가 있다.    〈천년의 정원〉은 중국의 유홍준인 위치우위가 열하를 보고 느낀 감상을 쓴 글이다. 한족의 입장이지만 위대한 왕조에 대한 경외를 느낄 수 있는 글이 들어 있다.    글 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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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27
  • 청더 피슈산좡 - 현존하는 중국 최대의 황가 정원
    옌산 산맥을 넘으면 다시 고속도로가 나온다. 고속도로를 타고 40분 정도를 달리면 청더에 닿는다. 청더 10km 전에 쑤앙타산(雙塔山) 등 재미있는 경관이 있지만 볼거리에 비해 입장료가 너무 높으므로 굳이 권하지는 않는다.    피서산장 사자상   청더는 옌산 산맥을 기점으로 북쪽인데 기온이 평균 5℃ 정도는 낮다. 이런 기온으로 인해 베이징의 황제들은 여름에 이곳을 찾아와 더위를 피하는 한편 주변의 평원에서 사냥을 하며, 국력을 키웠다.    물론 비가 오는 날이 많아 요즘은 후텁지근한 느낌을 갖기 쉽다. 우리 가족도 청더를 몇차례 찾았다. 우리 가족이 살던 베이징 왕징에서 가장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교외지역이고, 초원으로 가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피서산장 호수 전경 청더의 가장 중요한 볼거리는 피슈산좡(避暑山庄·피서산장)이다. 564만㎡의 거대한 이 별장은 이허위안의 2배, 구궁의 8배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현존하는 중국 최대의 황가 정원림이고, 여름에 황제가 이곳에서 업무를 관장하는 한편 외국 귀빈을 맞는 등 전반적인 황궁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피슈산좡의 가장 중요한 여행 지역은 정문인 리정먼(麗正門)을 들어가면서부터 만나는 궁뎬취(宮殿區)다. 말 그대로 이곳은 궁전이다.    리정먼은 1754년 건륭제 때 지어졌으며, 피슈산좡 최후의 관문 역할을 했다. 리정먼을 넘으면 아담한 나무로 둘러싸인 네이위먼(內午門·내오문)이 있다. 이 문의 정면에는 ‘피슈산좡(避暑山庄)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것은 강희제가 쓴 것이다.   그 다음 건물은 전체가 녹나무로 만들어져 난무뎬(楠木殿·남목전)으로도 불리는 단보징청뎬(澹泊敬誠殿·담박경성전)이다. 이 건물 역시 비교적 소박하게 느껴지는데, 외국에서 온 손님들을 접견하거나 축하 연회를 여는 곳이다.    단보징청뎬을 지나면 쓰즈슈위(四知書屋·사지서욱)가 나온다. 이곳은 서재가 아니고, 황제가 단보징청뎬으로 나갈 때 옷을 갈아입는 장소였다. 이 건물 뒤편은 옌보즈수앙(煙波致爽·연파치상)이다.    이곳은 황제의 침전으로 황제가 일상을 보내던 곳이다. 동서 양쪽은 황후의 거실이다. 서쪽에 있는 시누완각(西暖閣·서난각)은 서태후가 거처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시누완각은 서태후가 거처했던 곳 하지만 강희, 옹정, 건륭제 3대의 치적은 나약한 성격의 가경제(嘉慶帝·제위 1796~1820)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족은 물론이고, 소수민족의 반란이 빈번했고, 서구 제국주의 세력도 중국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유약한 치세를 거치다가 1820년 피슈산좡에서 사망했다. 아버지가 이곳에서 죽자, 아들 도광제(道光帝·제위 1821~1850)는 피슈산좡을 멀리했다.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진 피슈산좡은 1860년 9월 다시 시끌벅적해진다. 함풍제(咸豊帝·제위 1851~1861)가 온다는 소식이 왔기 때문이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으로 진격해 들어가자 피슈산좡으로 몽진을 했기 때문이다. 이때 함께 따라가지 못하고 위앤밍위앤(圓明園)에 남아 있던 함풍제의 비빈(妃嬪)들은 이곳이 점령당하여 불길에 휩싸이게 되자 모두 호수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이렇듯 함풍제는 선조들처럼 사냥을 하면서 국력을 다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란을 피해 도망을 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피슈산좡에서 궁뎬취의 면적은 그다지 크지 않다. 남은 지역은 대부분 드넓은 구릉과 평지다. 이곳을 편하게 돌 수 있는 순환차가 있어서 여행자들은 한 시간 남짓이면 쉽게 돌아볼 수 있다.    황제의 야외 파티장인 완수위안(萬樹園)을 지나서 러허(熱河)의 발원지를 볼 수 있다. 러허는 말 그대로 〈열하일기〉의 열하다. 발원지에서 호수까지 20m가 이 강의 전부인데,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짧은 강으로도 유명하다.    열하발원지   글 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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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26
  • 만리장성...지구 밖에서도 골라보는 재미가 있다
      10년 가까이를 살았지만 베이징의 한여름을 나기는 쉽지 않다. 40도까지 수은주로 오르는 고온도 고온이지만 인공비로 인해 습도도 높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나았겠지만 과거라고 다를 리 없다. 그래서 황제들은 이허위안(颐和园)이나 위앤밍위안(圓明園) 등을 세우고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려 했다. 그런데 사실상 지금의 중국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강희제(재위 1661∼1722)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휴가지를 만들었다.    바로 열하(熱河 현지명 청더 承德)다. 베이징에서 청더까지는 기찻길로 256km다. 말을 타고 달리면 하루면 닿겠지만 황제의 행렬은 가마로 서서히 그곳을 향했다.   굳이 바삐 달릴 일은 없으니 그 길을 천천히 감상하면서 가보자. 사실 황제가 그 길을 향하면 길에는 약 50m 간격으로 공연을 벌였다고 한다. 황제가 아니니 곳곳에서 그런 공연을 기대할 수 없지만 대신에 중앙선을 추월선으로 삼는 중국 운전사들의 곡예와 같은 운전 실력을 감상하면 흥미 만점이다.   만리장성   이 길은 〈열하일기〉에서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일야구도하기’와 ‘야출고북구기’ 등이 나온 곳이다. 당시 연암 일행은 황제가 수일 내로 당도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폭우로 강물이 넘실대는 이 길을 건너서 열하를 향했다.    이제는 고속도로가 뚫려서 청더 가는 길에 중간 도시인 미윈(密雲)까지는 한 시간 정도면 갈 수 있다. 미윈부터는 다시 국도를 타고 베이징 등 화베이 지방의 북쪽 방벽 역할을 하는 옌산(燕山) 산맥을 지나야 한다.    만리장성은 한족들이 북쪽에서 내려오는 기마민족을 쌓기 위해 만든 보호막이다. 열하로 가는 길에 가장 통과하기 쉬운 길이 구베이코우(古北口)다. 구(口)는 말 그대로 만리장성의 노선 가운데 지대가 낮아서 관문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고북구 장성   중국 역사에 밝았던 연암 박지원은 이것을 지나면서 열하일기 가운데서도 최고의 문장이라는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밤에 고북구 장성을 지나며)’를 썼다.   과거 수없는 전장이었던 그곳을 조선의 선비가 지난다는 것에 연암은 무척이나 가슴 뿌듯했고, 장성의 한 돌에 자신이 지나갔다는 글을 쓰고 스스로도 문장을 지었던 것이다.    보통 베이징 여행때 가는 만리장성은 베이징의 정북에 있는 빠다링(八達嶺) 장성이다. 시내에서 한 시간 남짓에 도착해서 많이 가지만 장성의 옛 모습은 없고, 장삿속만 보이는 장성이 빠다링 장성인데 구베이코우 장성의 인근에는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장성의 웅장함을 엿볼 수 있는 장성들이 산재해 있다.    동쪽에서 쓰마타이(司馬臺) 장성을 시작으로 진산링(金山嶺) 장성, 구베이코우 장성, 무톈위(慕田峪) 장성, 황화청(黃花城) 장성 등이 차례대로 이어져 있다.   이 장성들은 모두 각기 다른 역사와 특색을 갖고 있다. 현대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창청을 보고 싶은 이가 있다면 쓰마타이창청을 권한다.    쓰마타이(司馬臺) 장성 이곳은 만리장성의 모든 특징을 한 곳에 모아 놓은 듯하여 ‘장성 박물관’이라고도 한다. 장성(長城)은 중국 건축물의 최고로 꼽히며, 이 중 쓰마타이창청은 중국 장성의 최고로 손꼽힌다는 말이 있다.    쓰마타이창청의 가장 험한 곳은 ‘시엔뉘로우’(仙女樓)와 ‘왕징로우(望京樓)’로 통하는 길목이다. 높이가 100여m에 이르며, 경사도는 85°로 거의 수직이며 유일한 길목이다. 계단이 발 하나 간신히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좁고 작으며, 양쪽으로 가파른 절벽을 이루고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진산링 장성 쓰마타이가 장성 건축의 다양한 면모를 갖고 있다면 진산링 장성은 ‘만리장성 금산독수(萬里長城 金山獨秀 만리장성 가운데 금산령이 으뜸이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웅장한 모습이 특징이다. 2인용 작은 케이블카로 올라간 후 5분쯤 걸으면 만리장성이 나타나는데, 곳곳에서 감탄을 자아내는 명승이 펼쳐진다.   동쪽으로 이어진 장성은 이번에는 구베이코우에 닿는다. 구베이코우 장성은 낮은 지역에 있어서 웅장함은 없지만 관문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지금은 황제들이 다니던 여정들을 전시한 문화관이 만들어져 여행자를 맞는다.   구베이코우를 지난 장성은 서쪽으로 흘러가 무톈위 장성이 된다. 무톈위 장성은 여러 가지 장성의 특색을 모은 곳이다. 베이징 시내에서도 비교적 접근도가 좋은 곳이다. 올라갈 때는 케이블카로 올라가 내려올 때는 화다오(滑道 철판 봅슬레이)를 타고 내려오면 스릴 만점의 여행이 될 수 있다.   글=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 오피니언
    • 죽기전에 가야할 중국 여행지
    2020-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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