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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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이징의 밤-동즈먼 구이지에는 명불허전
    사실 여느 여행이나 밤시간을 즐겁게 보냈느냐에 따라 그 여행의 성패가 나누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이징은 어떨까.    동즈먼(東直門) 구이지에(い街)도 명불허전의 명소다. 우선 이곳은 새벽 2~3시까지 있어도 전혀 부담이 되지 않은 골목은 이곳뿐이다.  동즈먼(東直門) 구이지에(い街) 골목   또 홍등도 잘 만들어져 있어서 여행의 흥취를 더한다. 구이지에는 지하철과 연결되어 교통도 편리하다. 우선 동즈먼 지하철역 A출구로 나와서 뒤로 돌면 3다리의 제기(祭器)가 보인다.    이 방향으로 30m쯤 걸으면 오른쪽으로 동즈먼네이따지에(東直門內大街)가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구이지에지만 중심가로 가려면 600m쯤 가야 한다.    여기서부터는 홍등으로 장식된 길이 펼쳐지는데 주변으로 다양한 맛집이 펼쳐져 있다. 올해부터는 지하철 5호선 베이신치아오(北新橋)에서 내려서 지하철 출구를 나오면 구이지에의 메인 거리에 바로 닿는다.    화지아이위앤이 가장 대표할 만한 곳인데 우선 이 집은 베이징의 전통 가옥인 쓰허위앤(四合院) 구조로 되어 있다.   호우하이(后海)   대문의 옆으로 난 입구로 들어가면 수족관이 있고 내부가 펼쳐지는데 지붕이 있는 야외와 내부 식탁들로 나뉜다. 입구에는 저우룬파(주윤발), 거요우(갈우) 등 이곳을 다녀간 연예인 사진도 있다.    동즈먼 구이지에가 밤 늦게까지 미식을 즐기면서 술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면 호우하이(后海)는 바에서 중국 당대 술집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치엔하이(前海)와 호우하이(后海)의 주변으로 수많은 바들이 몰려있다.    밤이 되면 공연도 하고, 술도 판다. 또 치엔하이 쪽에서는 유람선을 빌려 호수 위에서 즐길 수 있는데 큰 배에서는 양로우추알(羊肉串)을 즐길 수도 있다. 배에 따라서는 얼후(二胡)를 타는 연주자가 있기도 하다.    또 호수의 주변으로는 수많은 바들이 있다. 그 중에는 베이징의 재즈 바 가운데 가장 유명한 동안東岸도 이곳에 있다.    르탄공위안(日檀公園)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밤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이다. 공원 서문으로 들어가 바로 우회전해 조금 걸으면 스팡바가 있다.    르탄공위안(日檀公園)   호수를 배경으로 이허위안의 대리석 배를 본따 만든 곳인데, 스톤보드바로 유명하다. 북문 앞에는 샤오왕푸(小王府)라는 전통 중식당이 있다.    공원의 오랜 수목과 그 안에 있는 식당이 잘 조화되고, 2층은 야외 라운지도 있어서 식사를 즐기기 좋은 곳이다.    이밖에도 싼리툰 지우빠지에는 오래된 바거리다. 다만 이곳은 최근에 호객행위와 바가지로 얼룩져서 그다지 권하지 않는다. 베이징의 코리아타운 왕징과 대학가인 우다코우도 밤 문화가 있는 지역 가운데 하나다.    글/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중국여행지 50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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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03
  • 따리, 일주일만 묵으면 떠날 수 없는 땅
    따리(大理)는 쿤밍처럼 번화하고 깨끗한 느낌도 없다. 리지앙처럼 완벽한 옛 도시의 풍모도 없다. 하지만 이상한 매력이 있다.    대리 삼탑사  99년 겨울 떠난 이곳 첫 여행에서 필자는 지독한 감기를 얻었다. 3일후 충칭에 도착할 때까지 거의 초죽음의 상태로 헤맸는데도 이 도시가 여전히 정감있는 것은 아마 뭔가 가까운 느낌의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리는 〈삼국지〉속 제갈공명의 능력을 보여주는 칠종칠금(七縱七擒) 고사를 만들어낸 맹획과의 전투 현장이다. 소설 속에서 맹획은 동맹 세력으로 다양한 전투방식을 가진 세력들을 불러오는데 주변 소수민족이 그 모티브다.    또 동굴이나 이상한 강들이 나오는데 윈난의 독특한 강의 그 배경이다. 따리는 서부 윈난의 중부에 위치하고 해발 고도 1976m이다. 여기는 바이주(白族)를 위주로 한 소수 민족의 자치 지역이 있는 곳이다.   시의 상당 지역이 녹색의 삼도차(三道茶) 밭으로 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따리 여행은 따리구청(大理古城 대리고성)에서 시작된다. 따리 남문은 따리구청의 표지이다. 새로 수리한 성벽에 올라서서 등 뒤에 창산을 두고 얼하이를 건너보면 아래로 따리구청을 굽어볼 수 있다.    시저우고성  따리구청은 대리국의 도읍지였을 때 축성된 것으로 남문과 북문을 중심으로 세워진 고택들이 매력 있다. 안에는 우리나라 사람이 운영하는 넘버 3 게스트하우스도 있다.    이곳에서는 오후 1시쯤에 출발하는 남조풍정도 상품을 운영하는 데 인기가 많다. 구청의 동쪽에는 충썽쓰산타(崇聖寺三塔)가 있다. 창산 잉러펑(應樂峰) 아래에 있는데, 따리구청에서 걷거나 마차를 이용하는 것 모두 좋다.   얼하이(洱海 이해)는 따리를 둘러싼 거대한 호수다. 호수 주변으로 따리시는 물론이고 싼타스(三塔寺) 등이 배치되어 있다. 얼하이에는 유람선이 있는데 한 사람이 80위안 정도이며, 바이주의 특산인 삼도차(三道茶)에 관한 연극을 볼 수 있다.    얼하이  처음에는 쓰고, 두 번째는 달고, 세 번째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이름이 붙여진 삼도차는 차의 품질 자체는 높지 않아 가격은 그다지 비싸지 않다.   리지앙에서 후토샤 트레킹을 하지 않은 짧은 일정의 여행자라면 창산(蒼山) 트레킹을 권한다. 창산은 디엔창산(点蒼山)이라고도 불리고, 따리 관광지를 중심으로 얼하이와 마주하는 고산 지역이다.    무협 작가의 대부 진용(金庸)의 <천룡팔부>에서 링쮸펑(靈鷲峰)이 바로 여기다. 창산의 산허리를 따라 등산로가 하나 개발되었는데 따리구청의 북문 밖에 리프트가 있다. 리프트를 탄 다음 내려가서 두 개 방향을 모두 여행할 수 있다. 각기 방향을 돌아보는 데 하루씩 걸린다. 풍경은 모두 볼 만하며 한 개 방향만 선택하여 트레킹하면 된다.   글=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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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4
  • 쿤밍 ‘꽃의 도시’로 여행의 포스트
      윈난 성 중부에 위치한 쿤밍은 해발 고도 1895m로 윈난 성 여행의 중심이자 그 자체도 훌륭한 여행지다. 도시의 내부는 이미 현대화한 고층 빌딩이 들어선 고성장의 도시다.    성(省) 정부가 철저한 물가 억제 정책을 펼치는 한편 교통 등 여행 인프라를 구축해서 이미 세계 유명 여행 도시로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쿤밍 위앤통스 쿤밍은 맑고 푸른 하늘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겨울에 8℃, 여름에 20℃를 넘지 않는 좋은 기후를 갖고 있다. 겨울에도 노천 카페에서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서양의 휴양 도시를 온 느낌이 들 정도다.    쿤밍의 날씨는 사계절이 봄 같은데 아침과 저녁에는  8~10℃ 정도 온도 차이가 있어서 저녁에는 옷을 많이 입고 다녀야 한다. 비가 오면 날씨가 5℃까지 내려가므로 이때도 옷을 많이 입어야 한다.    만약에 날씨 변화에 주의하지 않으면 감기에 걸리기 쉽다. 감기에 걸리면 반드시 병원을 찾는 것이 좋다. 고산 지대이기 때문에 평지보다 회복이 느리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쿤밍으로 가는 기차에서는 물론이고 호텔, 길거리 등지에서 여행 패키지를 파는 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쿤밍에서 여행 상품을 구입하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행동이 아니다. 쿤밍은 여행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있어 의지만 있으면 싸고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으므로 스스로 여행지를 찾고 결정해 가는 것이 좋다.     쿤밍 시내에서 가장 대표 여행지는 위안통스(圓通寺 원통사)다. 위안통스는 쿤밍 시 베이위안통(北圓通)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당나라 때 건설한 절로 윈난에서 우수한 고대 건물의 하나이다. 이미 12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사찰의 나무 조각이 일품이다.    위안통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추이후공위안(翠湖公園 취호공원)이 있다. 위안통스에서 남서쪽으로 걸어가서 만날 수 있는 호수 공원이다. 각기 섬들이 다리로 연결되어 있고, 연잎이 호수에 비취같이 떠 있어 이러한 이름이 붙었으며, 시민의 휴식 공간이다. 이 밖에도 윈난 성의 다양한 문화가 전시된 윈난셩보우관(雲南省博物館) 등이 관광지로 꼽힌다.    윈난성 소수민족의 바로미터인 윈난민주춘(雲南民族村 운남민족촌)은 윈난 시내에서 가장 풍성한 여행지다. 윈난민주춘은 뎬츠와 쿤밍 시가 접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 장주(藏族)를 비롯해 바이주(白族), 나시주(納西族) 등 24개 소수 민족 문화를 자세히 살필 수 있다. 각 소수 민족이 직접 운영하는 이곳은 쇼핑을 위한 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다. 역 앞 진화다주디엔 옆에서 그곳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탈 수 있다.   아침부터 소수민족들이 시간에 맞추어 다양한 공연을 한다. 미리 시간을 알아두면 좋아하는 공연을 즐길 수 있다. 다만 이곳은 좀 박제화한 느낌의 소수민족 문화촌이다. 따리, 리지앙 등 소수민족 여행지를 직접 여행할 여행자라면 굳이 가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스지위안이보란위안(世界園藝博覽園 세계원예박람원)은 1999년 세계원예박람회를 보존한 것으로 쿤밍 시의 동북 교외에 있는 찐뎬(金殿) 풍경 명승지에 있다. 쿤밍 시와  4km가량 떨어졌지만 시내 곳곳에서 버스들이 다녀 교통이 편리하다.    당시 세계 90여 개국과 지방·국제 조직이 여기에 전용 전람원을 설치했다. 실내 전람관은 중국관, 사람과 자연관, 대온실, 과학관이 있고, 국제관과 실외 전람관에는 약초관을 포함해 10여 개국의 별도 전람관 등이 있다.    롱먼(龍門 용문)은 시선린공위안(西森林公園 서삼림공원) 안에 있는 곳으로 시에서 26km가량 떨어진 톈츠의 한쪽에 자리잡고 있다. 룽먼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원나라 때 지어진 산칭거(三淸閣), 타이화스(太華寺), 화팅스(華亭寺) 같은 고찰들을 만날 수 있다.    입구에서 코끼리차로 올라가 톈츠 벼랑으로 난 길을 따라 정상까지 간 후 리프트로 내려오는 코스가 좋다. 이렇게 하면 등용문이지만 반대로 하면 낙용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삼라만상이 기기묘묘한 돌로 표현되었다는 스린(石林 석림)은 보통 지우샹과 묶어서 하루 정도 투자해야 한다. 350㎢의 넓은 지역에 형성된 이곳은 세계 유명 카르스트 지형의 하나이며, 중국 4대 자연 경관 중 하나이기도 하다.    스린(石林 석림) 전경 쿤밍에서 동남쪽으로 120km 떨어진 루난이족(路南彛族) 자치현 내에 있다. 가장 많이 들르는 곳은 다스린(大石林)으로 2시간가량이면 대충 둘러볼 수 있으며,  스린성징(石林勝景)을 비롯해 왕펑팅(望峰亭) 등 기이한 형상의 돌을 볼 수 있다.    다스린의 한편에는 샤오스린(小石林)이 있다. 이곳을 대표하는 기암 괴석은 슬픈 전설을 가지고 있는 아스마석(阿詩瑪石)이다.     단체 관광객들에게 빠지지 않은 지우시앙(九鄕 구향)은 쿤밍시 이량(宜良)현 내에 있으며, 쿤밍에서 스린까지 가는 여행 구간의 중간이다. 지우시앙에서 쿤밍 시까지 90km, 이량 현까지는 40km다. 난스린(南石林) 풍경구까지 20km 떨어졌다.    문을 들어가서 보트를 타고 강을 보는 것으로 시작해 동굴을 본 후 정상부에서 리프트를 타고 내려오는 방식으로 여행한다.     글=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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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1
  • 황룡-지우자이거우 신비한 기운이 만든 협곡
    추안주스  쑹판에서 17km쯤 가면 추안주스(川主寺)가 나온다. 이곳에 2년 전 비행장이 만들어져 황롱-지우자이거우 여행이 한결 쉬워졌다. 현재 청두와 하루에 20여 대의 항공편이 있다. 비행 시간은 45분이지만 항공료가 980위안(텍스 100위안 불포함)으로 할인항공권도 거의 없어 가난한 배낭여행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때문에 두지앙위앤-마오셴-추안주스로 가는 민지앙 육로나 조금 길이 더 정비된 지앙요(江油), 핑우(平武)의 길을 따라 접근해야 한다. 황롱과 지우자이거우는 길이 잘 정비되어 2시간여의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황롱은 누런 석회암 지형들이 빚어내는 빛이 아름답고, 지우자이거우는 바다의 아들(海子)로 불리는 작은 못과 계곡이 인상적인 곳이다. 어떤 이들은 이 두 곳 중에 하나만을 보고 오는 이들이 있는데 간 김에 꼭 두 개를 다 볼 것을 권한다. 다만 황롱은 고개를 넘어가는 길에 해발 4000m가 넘는 고산을 통과해 고산증이 올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황롱은 도보(혹은 유료 가마)로 가야 하는데, 고도가 높아서 아주 숨에 차다는 점을 알아둬야 한다.   공항과 가까운 황롱(黃龍 황룡)은 석회암에 물이 고여 만들어진 작은 호수들로 이루어진 이곳은 마치 계단식 밭처럼 연결되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지우자이거우가 메인 식사였다면 황롱은 더 맛을 내는 후식 정도. 위치적으로는 지우자이거우와 산 하나를 뒤로하고 있는데 위추이산(玉翠山)을 넘으면 지우자이거우다.   황롱 여행은 등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입구에 들어서 산을 올라가면 석회암 호수와 자연목의 조화, 폭포 등 갖가지 비경이 펼쳐진다.   도보 거리는 7km 남짓이지만 출발점이 해발 3170m, 등산 코스 끝인 황롱스(黃龍寺)가 3650m로 해발 고도가 상당히 높아 등산하는 데 호흡에 곤란을 겪는다. 건강한 이라면 지장이 없지만 노약자나 폐기능이 약한 사람은 산소 베개를 입구에서 빌려 올라갈 수 있다.   일행이 여러 명이라면 많이 빌리기보다는 하나 정도 빌려 상태가 안 좋은 이가 사용하는 것이 돈도 아끼고, 산소 베개를 휴대하는 불편을 더는 방법이다. 황롱 여행의 절정은 어디보다는 가장 높은 지점에 있는 우차이츠(五彩池)라는 점을 감안해 힘들더라도 정상까지 오르는 용기가 필요하다. 지우자이거우에서는 아침 6시에 버스가 있다. 치엔주스에서는 1시간 거리로 비교적 버스가 많다. 지우자이거우(九寨溝 구채구)는 신기한 호수 폭포와 기이한 경치, 희귀한 동물들로 이루어진 동화 세계로 이름나 있다. 108가지 색깔로 된 호수는 서왕모가 살았다는 전설이 있어 선경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티베트인이 사는 마을이 9군데 있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지우자이로 들어가는 관문은 대략 3곳이다. 지우자이거우의 여행은 루커중신(旅客中心)에서 시작한다. 먼저 결정할 것은 하루에 여행을 마칠 것인가 아니면 이틀에 마칠 것인가다. 2일 동안 여행할 경우 내부 수정짜이(樹正寨) 장족 마을에서 숙박해야 한다. 이틀 여행할 경우 두 번째 날은 원칙적으로 다시 내부 순환 차표를 사야 한다. 다만 갖가지 요령으로 피할 수 있다. 또 입구를 통해 들어갈 때 두 번째 날의 입장료는 40위안으로 대폭 할인되지만 순환버스표는 다시 사야 한다. 이 점을 감안해 하루에 여행을 마치는 게 좋은데, 아침 일찍 시작하는 게 좋다. 루커중신 부근에는 한 사람당 30위안 정도 하는 지아통빈관에서 표준방에 800위안까지 하는 궈지판디엔(國際飯店)을 비롯해 다양한 숙소가 있다. 버스 정류장이 있는 지우통빈관에서 입구인 커윈중신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다. 매표소에는 여행 수첩을 무료로 제공하니, 하나 챙기는 게 좋다. 매표소에서 나와 입구에 들어서면 진입로가 있고, 그 진입로에 따라서 오르는 차가 다르니, 일행이라면 한 줄로 서야 한다. 아침 일찍 차는 보통 리저고우(日則溝)의 종점인 위앤시산린(原始森林 원시삼림)에 세워준다. 하행하는 길이므로 이곳부터 여행을 시작하는 게 좋다. 위앤시산린을 돌아보는 데는 30분 정도 걸린다.   이곳을 기점으로 물이 내려가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내려가면서 기이한 모습의 리저고우의 모습을 즐긴다. 순환버스가 계속해서 정류장을 서고 내리면서 다니기 때문에 이동이 편리하다. 이틀을 여행한다면 하루 종일 리저고우만 보면 되지만 하루 만에 끌내려면 점심에는 여행 분기점인 뤄르랑(諾日朗)에 오는 게 좋다.   꼭 놓치지 않아야 하는 곳은 슝마오하이(熊猫海 웅묘해), 우화하이(五花海 오화해), 쩐주탄푸프(珍珠灘瀑布 진주탄폭포) 등이다. 쩐주탄푸프는 입구에서 돌아올 수 있는데, 여행단을 따라서 깊숙이 들어가야만 절경을 볼 수 있으므로 유의해야 한다.  뤄르랑 폭포  두 골짜기의 분기점인 뤄르랑에는 현대식 휴게실이 설치되어 있다. 형편없기는 하지만 뷔페식 점심이 25위안이어서 요기는 할 수 있다. 점심을 마치고 왼쪽에 있는 저짜고우(則渣溝 즉사구)행 버스를 탄다. 이 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리면 창하이(長海)다. 이곳을 보고, 우차이츠(五彩池)에 오면 2시간 정도 걸린다.   하루 일정이라면 여유 있다고 기다리지 말고, 바로 순환버스를 타고, 분기점인 뤄르랑 방향으로 내려온다. 뤄르랑 휴게소를 지나면 바로 폭포 정차장이 있다. 이곳에서 내려 가장 폭이 넓은 뤄르랑 폭포를 구경한다.   시간이 없다면 중간에 서지 않고, 바로 수정푸프(樹正瀑布)까지 내려온다. 샛길로 들어가 폭포를 본 후 하산길을 따라 걸으면서 물가에 집이 있는 곳이 있는데, 그곳을 보고 언덕으로 올라가면 이곳이 수정짜이(樹正寨) 지역이다. 장족 문화가 느껴지는 워롱하이(臥龍海)를 보고, 시간이 된다면 내려오면서 다른 경치들을 볼 수 있다. 글/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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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09
  • 쓰꾸냥상-워롱, 중국의 자연문화 보고
    쓰촨 시내에 있는 판다 관련 지역들이 철창 너머로 판다를 봐야 하지만 워롱에 간다면 실제로 생활하는 판다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또 네 명의 아가씨란 이름을 가진 쓰꾸냥산은 온난화로 위협받고 있지만 고고한 느낌으로 쓰촨 여성들의 표지가 되는 산이다. 두지앙위앤에서 30~50km만 들어가면 도착할 수 있기 때문에 쓰촨에 있는 공가산이나 샹그릴라의 만년설산에 비해 품을 적게 들이고 만년설산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선 쓰꾸냥산(四姑娘山 사고랑산)은 쓰촨성 간즈저우(甘孜州) 샤오진현(小金縣) 르룽샹(日隆鄕)에 위치하고 있다. 청두(成都)시까지 거리는 235㎞이며 해발은 순서대로 5333m, 5454m, 5664m, 6250m이다.   쓰꾸냥산   쓰구냥산은 일년 내내 눈으로 덮여 있어서 풍경이 아름답고 ‘수산즈왕’(蜀山之王)이라고 부르는 궁가산(貢잭山, 해발 7556m)과 마주 보기 때문에 ‘수산즈왕(蜀山之王) 둥팡아얼비스산(東方阿爾卑斯山)’이라고도 칭한다. 중국 내에서 새롭게 개발된 여행 지역인 쓰구냥산은 총면적이 450㎢며 쓰촨 서부 여행지 중에서 각광받는 곳이다. 쓰구냥산은 설산, 시냇물, 단풍, 협곡, 화초, 민족 풍습으로 유명하다. 쓰구냥산의 주요 명소는 창핑고우(長坪溝), 해즈고우(海子溝), 쑤앙쵸고우(雙橋溝)이다.   쓰꾸냥산   이 계곡들은 계곡마다 특색이 있는데, 그중 창핑고우와 해즈고우는 말을 타거나 걸어서 여행해야 하므로 여행하기에 힘들다. 길에 진흙이 많기 때문에 방수화를 신으면 등산하기 편하다. 쓰구냥산에는 총길이 30㎞로 평탄하게 열린 산 사이에 맑은 샘물이 흐르고, 높은 산에는 목양과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다. 5월과 12월, 1월, 2월은 여행하기에 가장 적당한 계절이다.   1월과 2월의 평균 온도가 영하 2℃다. 7월과 8월의 평균 온도가 12℃지만 5~10월간 강우량이 비교적 많아 본격적인 여름철의 여행은 힘들다.   쓰꾸냥산   숙박 상황은 좋지 않다. 창핑춘(長坪村)에는 쓰구냥산(四姑娘山)호텔이 있고, 르롱진(日隆鎭)에는 쓰구냥산주디앤(四姑娘山酒店)이 있으며, 르롱진에서 7km 떨어진 곳에 쓰구냥산산장이 있다. 음력 1월 3일에는 구어주앙핑(鍋莊坪)에서 쓰구냥 제사를 지내므로 이 시간을 맞추면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음력 5월 5일 단오에는 구어주앙핑(鍋莊坪)에서는 말타기 시합을 한다. 워롱(臥龍) 자연 보호구는 쓰꾸냥산 가는 길에 있다. 입장료는 판다관(熊猫館 30위안) 잉슝고우(英雄館 25위안), 작은 판다관(小熊猫館 5위안) 순이다. 작은 판다는 우리가 생각하는 판다라기보다는 너구리처럼 보이므로 특별히 관심 있는 이가 아니라면 별로 의미가 없다. 글/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 오피니언
    2020-02-03
  • 두지앙위앤-사람이 힘이 되는 문화의 발상지
    두지앙위앤 중국의 유홍준 교수라 할 수 있는 ‘위치우위(余秋雨)’는 “나는 중국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건축물은 만리장성이 아니라 두지앙위앤이라고 생각한다”고 과감히 말한다.   그가 두지앙위앤에 정성을 쏟는 이유는 이 조형물의 건축자인 이빙 부자의 애민정신이다. 만리장성 등이 지배자 중심의 욕심이 앞선 조형물이라면 두지앙위앤은 한 군수(郡守)의 백성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담긴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거대한 물줄기를 온순하게 만드는 두지앙위앤의 제방을 보는 그의 감회는 남다르다. 그는 이곳에서 “작가는 이를 통해 현재의 관료 사회에서 무위도식하는 고위 관리들을 향해 ‘살아 있든 아니면 죽든 간에 반드시 어느 곳에 서 있어야만 하는가’를 힐문할 것이다”며 그 감격을 말한다.   칭청산  사실 이빙이라는 인물 자체가 종교라고 할 만큼 주요한 곳이 두지앙위앤이라면 칭청산은 중국인 사상의 가장 근저에 있는 도교가 태어난 곳 가운데 하나다.   후한시대 오두미교를 만든 장릉이 이곳을 바탕으로 세를 만들어 갔기 때문이다. 지금은 소림, 무당과 더불어 중국 무술의 가장 중요한 성지가 된 것이다. 두지앙위앤(都江堰 도강언)은 청두 북서쪽으로 60㎞ 지점에 있다. 두지앙위앤은 2250여 년 전 진(秦) 소왕(昭王)시기에 이빙(李氷) 부자가 세운 수리 시설이다. 그저 그런 수리시설이라고 생각해 지나치기 쉬운데, 역사에 관심 있는 이라면 꼭 들러볼 것을 권한다.   수리 시설도 가치가 있지만 이빙 부자의 애민정신은 후대에 계속해서 위정자들의 귀감이 됐다. 따라서 이후에 계속해서 그의 치적을 기리는 의식과 건물들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빙 부자는 쓰촨 도교에서 신에 가까운 대우를 받을 정도. 고풍스러운 건물과 2년 넘게 이어온 역사의 흔적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지우자이고우 등지에서 발원해 수백km를 흘러온 민강(岷江) 물은 그 고도 차로 성도인 청두를 위협할 만큼 큰 물줄기로 바뀐다. 하지만 이 민강의 물길은 두지앙위앤에서 순한 양처럼 바꿔어, 인간들에게 해를 주는 홍수의 근원이 아니라 농사를 돕고, 각종 생활용수로 바뀐다.   바로 이런 작용에는 중국 최고의 수리시설 두지앙위앤이 있다. 두지앙위앤 치수의 가장 기본은 강 가운데 서 있는 진강디(金剛堤 금강제)의 앞부분인 위쭈이(魚嘴)다. 위쭈이는 강의 중간에 위치해 물을 외강(外江)과 내강(內江)으로 나누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작용은 청두 등 도시로 들어가는 물줄기의 양을 일정하게 조정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외강의 입구를 인위적으로 만든 조롱(鳥籠)으로 조절해 물의 양을 조절했지만 1970년대에 댐을 만들어 물의 양을 조절한다.   중요한 것은 내강으로 들어온 물의 조정이다. 내강의 물은 페이샤얜(飛沙堰)에서 물 속에 들어 있는 모래나 자갈을 걸러내는 한편 2차적으로 물의 양을 조절한 후 바오핑코우(寶甁口)를 통과해 실용적인 물로 바뀐다.   이 때문에 두지앙위앤은 현대의 댐이 갖는 자갈이나 모래의 퇴적 문제 등을 해결하고 2000년 동안 수리 시설의 기능을 해오고 있다. 두지앙위앤은 차분히 돌아보면 4시간 정도 걸리는 적지 않은 공간이다. 전체를 조망하는 친얜로우(秦堰樓)는 약간 높은 지점에 있어서 오르막이 싫다면 이곳에서 여행을 출발할 수 있다.(가는 법은 아래) 친얜로우를 보고, 내려오면서 얼왕먀오(二王廟)를 본다. 얼왕먀오는 이빙 부자를 모신 사당이다. 사당의 옆에는 치수에 관한 기념관이 있다. 얼왕먀오를 보고 길을 따라 내려오면 강의 진강디로 건너가는 안란수오치아오(安瀾索橋 안란삭교)를 건넌다. 건너면 위쭈이가 나온다. 위쭈이를 보고, 괘도차(15위안)를 타거나 걸어서(30분가량 소요) 진강티의 하류 부분인 샤페이얜으로 온다. 이곳을 보고 다시 삭교를 건너면 푸롱관(伏龍觀 복용관) 등이 있다.   푸롱관이 있는 이투이공위앤에서 다시 정문쪽으로 나오면서 치수의 치적을 이룬 이들의 동상이 서 있는 공원을 볼 수 있다. 또 이 코스와는 반대로 이투이공위앤 출입구로 들어가 친얜로우 방향으로 나올 수도 있다.   칭청산(靑城山 청성산)은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가장 많이 녹아 있는 도교의 중요한 발상지중 하나다. 중국 도교의 계통은 아주 다양하고, 그 발생지도 산둥성 타이산(泰山)은 물론이고 지앙시 롱후산 등 정말 다양하다.   하지만 가장 오랜 도교의 발생지는 쓰촨성이고, 쓰촨 도교의 근원지 가운데 하나가 칭청산이다. 쓰촨 도교는  2세기 무렵부터 시작했는데, 후한 시대 장릉(張陵 ?~156)이 이 지역에서 최초의 교단을 만들었다.   그는 교단에 들어올 때 쌀 다섯 말을 바치도록 해서 ‘오두미도(五斗米道)’라고도 불렀다. 이후 아들을 거쳐 손자 장로(張魯)에게 계승되어 본격 발전하게 된다. 그 본산 가운데 하나가 칭청산이다. 높이 1260m의 칭청산에는 한때 70개에 이르는 도교 사원들이 있었다고 하며 오늘날에도 30여 개가 남아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정상 가까이에 위치한 상청궁(上淸宮)과 장릉이 도를 닦은 곳에 세워진 천사동(天師洞)이다. 이밖에도 옥청궁(玉淸宮), 조양동(朝陽洞), 복건궁(福建宮), 원명궁(圓明宮) 등이 유명한 도교 사원이다. 칭청산 여행은 우선 신선들이 조각된 칭청산 대문을 지나서 케이블카를 타고 상청궁으로 올라간다. 상청궁 입구에는 앞뒷면에 ‘도(道)’ ‘대도무위’(大道無爲 큰 도는 인위적으로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쓴 커다란 돌이 놓여 있다. 상청궁은 칭청 도교의 중심 건물 중 하나로 각종 도교 문화가 현재화되어 있다. 상청궁에서 산 중턱에 있는 천사동까지는 걸어서 약 40분이 걸린다. 천사동은 수나라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세워진 수십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청성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교 사원이다.   알왕먀오 게다가 당 현종, 청 강희제의 친필 등 이곳을 찾은 수많은 고관과 문인, 지식인들이 남긴 각종 글씨와 자취가 풍부하다. 장릉이 도를 닦았다는 곳은 천사동 건물들의 뒤쪽 천연 동굴이다.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는 그의 좌상이 놓여 있었다.   천사동에는 또 장릉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와 그가 팠다는 연못, 붓을 씻었다는 나무통 등이 남아 있다. 천사동 정문 뒤에는 ‘재신전(財神殿)’이 있다. 칭청전산을 돌아보고 대문을 나서면 후산으로 가는 차가 수시로 있다. 또 칭청산은 청두 인근의 휴양도시로 성장해 골프장은 물론이고 각종 휴양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다만 좀 비싼 것이 흠이다. 글/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 오피니언
    2020-01-28
  • 청두-역사가 살아 있는 지상의 천국
      중국 여성들에게 하나의 금기가 있다. 남편을 청두(成都)로 출장 보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청두는 예로부터 항저우에 버금가는 미녀의 고장이다.   거기에 여성들이 쓰는 쓰촨 말의 나긋나긋한 흐름이나 다소곳한 자세는 남성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바람이 날 것이 뻔하니 쓰촨으로 출장 가지 말라는 것이다.   쓰촨에 미녀가 많은 것은 당연히 이유가 있다. 해를 보면 개가 짖을 만큼 태양을 볼 수 없는 날이 많으니 쓰촨 여성들의 피부는 우윳빛처럼 깨끗하다.     거기에 청두 평원은 중국 최고의 곡창으로 항상 풍작을 이루는 땅이다. 당연히 여성들의 영양 상태가 좋으니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여성들에게 좋은데 남성들에게 나쁠 리 없다.    때문에 청두는 예로부터 하늘의 마을(天府)로 불렸다. 청두는 관문부터 강의 냄새가 나는 쌍류(雙流)국제공항이 있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가다 보면 내륙에 이 정도의 도시가 있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인구 8500만 명을 가진 쓰촨의 중심도시 청두의 인구는 1060만 명이다. 시선 이백은 청두의 외곽도시인 지앙요(江油)가 고향으로 청두에서 많이 거주했다.   두보 초당 시성 두보는 피난길에 청두에서 살았는데, 이곳에서 결혼해 인생의 재미를 맛보았다. 두보의 시 가운데 가장 편안한 느낌의 시들은 이곳에서 지은 것들이다. 시내에 베이징에 못지않은 여행지들이 산재한 곳도 청두밖에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먼저 들리는 곳이 우허우츠(武侯祠 무후사)다. <삼국지연의> 인물 유비의 묘와 제갈공명의 사당이 있는 곳이다. 원래 명칭은 유비가 주군이어서 유비의 시호 소열제를 따서 한소열묘(漢昭烈廟)였지만, 후에 제갈공명의 시호인 충무후(忠武候)를 따서 ‘우허우츠’(武候祠)로 부르게 되었다.   우허우츠는 들어가면서 정문 방향으로 대문과 2문, 유비전, 제갈공명전, 삼의묘(三義廟) 등이 차례로 펼쳐진다. 왼편으로는 삼국문화 전시관이나 유비의 묘 등이 펼쳐진다.   무후사  마지막에 있는 결의루(結義樓)에서는 화요일과 일요일 오후 2시 30분부터 3시 30분까지, 매일 저녁 8시에는 희극이나 춤, 그림자 놀이 등 각종 공연이 펼쳐진다. 입구로 들어가다 비각에서 만나는 ‘출사표’에서 읽는 제갈량의 의지와 붉은 벽 사이 너머로 펼쳐진 대나무의 기상이 일품이다. 두푸차오탕(杜甫草堂 두보초당)은 시성(詩聖) 두보가 759년부터 4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두보는 일생 중 가장 평안한 삶을 보내며 240여 편의 시를 지었다.    당나라의 낮은 관리로 지나다가 전쟁을 맞아 뛰어난 재주를 펼칠 틈도 없이 부평초처럼 세상을 주유한 두보는 이곳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춘야희우(春夜喜雨), 모옥위추풍소답가(茅屋爲秋風所破歌) 등 편안한 분위기의 시는 대부분 이곳에서 지었다. 시내 칭양궁(靑羊宮 청양궁)은 노자(老子)를 기리는 도교 사당이다. 당나라 때 창건되고, 청나라 때 재건됐다. 매년 1월에 등회(燈會)가 열리고, 노자 탄생일인 음력 2월 15일에는 화회(花會)가 열린다.     청두 사람의 중요한 문화 가운데 하나인 차관(茶館)문화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입구의 좌측 등나무 아래 찻집들이 늘어서 있는데 이곳에서는 2~20위안에 차를 주문해서 하루 종일 앉아 있을 수 있는데, 각종 장기자랑 등 쓰촨인의 삶을 느낄 수 있다.   역시 찻집 문화를 볼 수 있는 곳이 왕지앙러우공위안(望江樓公園 망강루공원)이다. 이곳은 당나라 때 여 시인 설도(薛濤)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설도가 대나무를 좋아해 공원 전체에 대나무가 많고, 입구의 대나무 터널이 유명하다. 안에는 역시 차관이 잘 갖추어져 있으며, 기공을 하는 일반인의 삶을 볼 수 있다.   글 =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 오피니언
    2020-01-18
  • 세계 배낭여행자의 새로운 성지 윈난
    구름의 남쪽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윈난(雲南)은 중국 여행 마니아에게 가장 선호받는 지역이다. 필자도 5차례 정도 윈난을 여행했다.  이곳이 우리나라 여행자들의 코드에 꽂힌 것은 10년 남짓이다. 낯선 천국을 찾아 떠나는 노마드 중 하나였던 문영배 선생은 윈난 중원에 있는 따리(大理)에 둥지를 틀었다.    그는 말한다. “이곳에 이틀 정도 있으면 그저 괜찮은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3일 이상 있으면 이곳에 빠져서 떠나기 힘듭니다. 마치 이 땅이 행자를 잡는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그도 이곳에 정착해 ‘넘버 3’라는 소박한 게스트하우스를 만들었다.    위롱쉐산 하지만 이제 이곳도 오지라는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번화한 여행도시였다. 이곳에 사람이 붐비자, 아래쪽에서 게스트하우스를 하는 제임스 님에게 이곳을 맡기고 위롱쉐산(玉龍雪山) 아래로 옮겼다.    문영배 선생뿐만 아니라 벚꽃마을의 안방마님 김명애 씨도 초반기에 이곳에 빠진 노마드 중 하나다. 이곳을 여행하다가 마음이 있다면 이들을 만날 수도 있다.   물론 앞선 노마드이자 작은 사업을 하는 이로 만나야지 신선을 만나듯이 하면 안 된다. 사실 여행자들은 정당한 지불에 인색한데, 이런 자세는 옳지 않다.    따리에서 3~4시간쯤 걸리는 리지앙은 세계 배낭여행자들에게 성소 중 하나다. 1996년 이 도시에 리히터 지진계 7의 거대한 지진이 일어났다. 대부분의 지역이 폐허가 됐는데 지금의 고성 지역만은 안전했다.    수백 년 된 고건축이 큰 지진에서 버틴 것이 신기했고, 그 독특한 모습으로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됐다. 이 도시를 형성하는 포인트는 위추안(玉泉)호수에서 흘러나온 위허(玉河)가 도시의 중심을 여러 갈래로 관통하면서 만들어내는 독특한 모습이다.    윈난 중원에 있는 따리(大理) 얼하이 이름처럼 맑은 물빛은 도시를 청량한 모습으로 만들어낸다. 작은 시내 옆으로는 카페가 있다. 사람과 상권의 중심에 형성되는 쓰팡지에(四方街)는 도시 곳곳에 형성된 중심지로 밤에는 공연하는 장소, 낮에는 약속의 광장처럼 쓰인다.   고성은 각자의 취항에 따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 보이차나 날염 등 각종 특산물 쇼핑은 물론이고 나시족 전통 공연 등 낮과 밤으로 흥밋거리가 있다. 또 세계 여행자들이 모여서 혹시나 생길지 모르는 <비포 선 라이즈> 같은 사랑을 기대하며 바를 서성이기도 한다.    사실 제대로 된 하늘 아래 여행은 리지앙을 떠나면서 가능하다. 리지앙의 한 축에는 수허(束河)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윈난 남부 저지대인 시솽반나에서 시작되어 길게 이어진 차마고도(茶馬古都)의 중심 도시 중 하나다.    차마고도는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로 세계에 알려졌지만, 수허는 최근까지도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다. 필자가 2004년 9월, 여행 기사에 이 단어를 썼는데, 네이버에 검색되는 차마고도에 관한 첫 기사일 정도다.    차마고도는 이후 티베트를 향해서 이어진다. 라싸까지는 도보로 가면 수개월이 걸리는 험난한 길이다. 차로 가도 아무리 빨라야 4일, 보통 일주일은 걸리는 길이다. 지금도 낙석이 떨어지는 위험한 길이다.    하지만 길의 중간에는 봄이면 두견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신비한 설산들이 모자를 쓰고 있다. 라싸를 향한 참배객도 만날 수 있고, 중디엔(中甸)이나 더친(德欽), 망캉(芒康), 보미(波密), 린즈(林芝) 같은 도시들을 지난다.    이 길에서 내가 느낀 것은 갈수록 힘들어 하는 땅 신들의 분노였다. 지구온난화는 만년설산을 가진 이곳에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설산은 갈수록 위축되어 가고 있었다.    그 현장에서 나는 황석영 선생의 〈바리데기〉에서 나온 한 문장을 생각했다. “사람들의 욕망 때문이래. 남보다 더 좋은 것 먹고 입고 쓰고 살려고 우리를 괴롭혔지. 그래서 너희 배를 함께 타고 계시는 신께서도 고통스러워하신대.”   구름 아래의 마을 윈난(雲南)은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말한 샹그릴라의 실제 모델로 가장 유력한 곳이다.    몇 년 전부터 이 지명으로 중국 동네들 간에 만만치 않은 기 싸움도 있었지만 어떻든 윈난 성 북부에 넓게 펼쳐진 지역이 샹그릴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샹그릴라의 중요한 요소들로는 만년설산, 모계사회, 장족 불교 등의 특징이 있는데 이곳이 그 조건에 부합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실 윈난성은 40만km2로 남북한의 두 배 정도 면적인데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고도 100m에서 6740m까지 다양한 지형이다. 태국을 닮은 시솽반나에서 쿤밍, 따리, 리지앙, 샹그릴라(중뎬), 더친으로 이어지는 길은 여행자들에게 아주 행복한 곳이다. 사실 윈난은 바삐 돌아도 두 달은 투자해야만 대강이나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글=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 오피니언
    2020-01-07
  • 옌지-발해 유적에서 한민족을 만나다
    옌지는 조선 자치주의 중심 도시다. 사실 200만으로 우리나라 면적에 달하는 거대한 자치주를 가지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족 자치주는 만들어졌다.  일송정  자치주가 가능하게 했던 곳은 지린성 항일 희생자의 80%에 달하는 이가 조선족 동포일 만큼 적극 투쟁한 힘과 주덕해(朱德海, 1911~ 1972)라는 한 인물이 있기에 가능했다.    주덕해는 항일 운동을 하다가 러시아 유학을 마치고 온 후 중국 혁명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마오나 저우언라이 등과도 깊은 친분이 있었는데 그들을 설득해 자치주를 만들어냈다.    그는 옌변대학의 창립에 주도하고 연변가무단을 만드는 등 교육과 예술에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문화대혁명 당시 핍박을 받다가 죽었지만 그의 노고는 지금도 옌변대학의 뒷산에 있는 기념비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사실 이 지역에서 우리 민족의 자취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고구려는 물론이고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가 옌지와 그 북쪽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1880년경 한국인이 우물을 처음 발견하였다는 롱징 기원(起源) 우물   옌지는 한국인 여행객이나 한국에 간 이들이 보내는 송금으로 인해 가장 번화한 여행도시가 됐고, 최근에는 중국인들도 밀려오는 곳이다.    옌지 자체는 여행지가 많지 않지만 서시장 등의 상가는 하루쯤 투자해 돌아봐도 아깝지 않다. 옌지 인근에 가장 대표적인 곳은 롱징(龍井 용정)이다.    롱징은 윤동주 시인의 유적은 물론이고 독립운동의 현장, 또 중국 내 조선족 동포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곳이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3·13만세운동의 현장(용정중앙소학교)을 비롯하여 1880년경 한국인이 우물을 처음 발견하였다는 롱징 기원(起源) 우물이 있다. 윤동주가 다녔던 대성중학도 이곳에 있다.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海蘭江)이 시내를 가로질러 흐른다. 이 강은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그 강이다. 해란강과 더불어 비암산의 일송정(一松亭)은 그 노래에 대한 감상을 더한다. 3·13 반일의사의 묘지, 시인 윤동주의 묘, 한왕산고성(汗王山古城) 유적 등이 있다.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海蘭江)이 시내를 가로질러 흐른다.     옌지에서 동으로 한 시간 거리인 투먼(圖們 도문)은 두만강을 놓고, 북한과 접경한 지역으로, 창춘은 물론 헤이롱지앙의 도시인 무단지앙(牧丹江)에서 운행하는 열차의 종점인 도시다. 북한과 다리가 연결되어 있는 곳 가운데 하나고, 현재도 이 다리를 통해 북한과 중국간의 물자 등이 오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옌지에서 왕청 汪淸을 거쳐 북쪽으로 가거나 둔화(敦化)에서 새로 난 길로 무단지앙(牧丹江)시 방향으로 150km쯤 가다 보면 동징청(東京城)이 나온다. 투먼에서 무단지앙 시로 가다 보면 둥징청 역을 경유하는데 바로 그 역 부근이 고구려의 후손들의 주도로 세워졌다가 멸망한 발해의 도읍터다.    정확히 하면 헤이롱지앙성(黑龍江省) 닝안현(寧安縣])의 남쪽 36㎞ 지점에 있는 발해(渤海)의 상경용천부지(上京龍泉府址). 1933∼1934년 동아고고학(東亞考古學)의 발굴 조사로 그 전모가 밝혀진 이곳은 외성의 벽은 토성(土城)으로 동벽 3211m, 서벽 3333m, 남벽 4455m, 북벽 4502m 규모의 직사각형 모양이다.  이 성은 발해의 제3대 문왕(文王)이 당나라의 장안성(長安城)을 약 8분의 1로 줄여서 모방 축조한 것이다. 내성은 황성에 걸맞은 관아 구역이고, 내내성은 궁성에 대응하는 왕궁의 부분이다.  윤동주가 다녔던 대성중학  내성의 남쪽 중앙에서 주작문(朱雀門)에 해당하는 문지(門址)가 발굴되었고, 여기에서 외성 남쪽 중앙으로 주작대로(朱雀大路)가 뻗어 있다. 내내성에서는 6개의 궁전지(宮殿址)와 회랑지(回廊址)가 발굴되었고, 여기에서 돌로 만든 사자머리·녹유주좌(綠釉柱座)·녹유의 각종 기와·당초(唐草) 무늬의 벽돌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외성의 중앙 남문 근처에서 4개의 사원지(寺院址)가 발견되었고, 찰흙으로 만든 부처, 벽화 조각, 쇠로 만든 부처 등이 출토되었으며, 지상 유물로는 높이가 6m나 되는 용암제(熔岩製)의 석등(石燈)이 있다. 이 유물들은 우리들에게 독특한 느낌을 갖게 한다.    백두산 여행을 떠날 경우 틈을 내어 이곳과 가까운 아름다운 호수 징버후(鏡泊湖)를 들러볼 만하다. 징버후는 무단지앙에서 100㎞ 떨어져 있으며, 중국에서 제일 크고 유명한 화산 호수다. 이 호수는 약 1만 년 전 화산이 폭발할 때 무단지앙의 일부분과 양쪽 용암이 합쳐진 것이다. 호수 주위에는 여기저기 화산이 폭발한 후에 남은 흔적을 볼 수 있다.     글 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 오피니언
    2019-12-20
  • 백두산-장엄하고 신비한 기운이 머무는 천지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으로 가는 길은 다양하다. 과거에는 옌지(延吉)로 들어가 5시간쯤 차를 타고 얼다오바이허(二道白河)를 거쳐서 장백폭포 방향으로 가서 여행하는 북파노선이 유일한 노선이었다.    백두산 천지   지금은 통화에서 송강하를 경유해 가는 서파는 물론이고 창바이셴(長白縣)을 통해 가는 동파 등 다양한 여행길이 있다. 또 산문 근처에 비행장이 개통했다.    백두산의 해발은 2744m이다. 산 위에는 사시사철 눈이 쌓여 있고 많은 암석들이 흰색을 띠고 있으므로 백두산이라 했다.    중국에서는 창바이산(長白山)으로 부른다. 백두산은 송화강, 두만강, 압록강의 3대 강물의 발원지다. 서쪽, 북쪽, 남쪽은 물론이고 북한 삼지영쪽인 동으로 난 물길도 있으니 온 생명의 발원지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필자는 다섯차례 백두산을 찾았다. 전부 여름이었다. 초여름 독립운동가를 취재하는 길에 천지에 닿았을 때는 6월 말임에도 천지는 얼어있어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어떤 때는 필자의 마음이 잘못됐는지 천지는 온통 안개로 덮여 있어 물의 흔적조차 보여주지 않은 때도 있었다. 사실 백두산 영봉이 둘러싼 천지를 보기 전에 막연히 하는 ‘민족의 영산’이라는 말을 실감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곳을 보는 순간 우리 민족의 시원이 이곳에서 나왔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천지의 입구인 바이허는 백두산 입구 마을이다. 백두산으로 가는 첫걸음은 먼저 바이허로 들어오는 일부터 시작된다. 바이허는 얼도우바이허와 붙어 있다.    바이허에서 백두산 첫 관문인 산문 매표소까지는 자동차로 약 40분 걸린다. 산문 안은 이제 하나의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여행지다. 산 안에서는 환경차만이 이동하게 해서 산문에서 내부 환경차를 따라 잡아야 한다.    내부로 들어가면 우선 천지(天池)에 가장 많은 관심이 쏠릴 것이다. 지금 천지를 보는 노선은 접근하는 방식에 따라 많이 다르다. 우선 이전부터 지프로 올라보는 톈원펑(天文峰)이 대표할 만한 곳이다.    우리 민족의 정신이 발원한 곳인 천지는 하늘과 물이 연결되고 파란 수면에 흰 구름이 떠돌아 경치가 수려하다. 하지만 평상시에 구름이 많이 끼고 폭우와 우박이 자주 내려 쉽게 이런 정경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코스의 최대 약점은 평상시 천지를 볼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어 상당수의 사람들이 천지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워낙 날씨가 춥고, 지프의 대기 시간이 있어서 마냥 기다릴 수도 없다.    다음은 창바이 폭포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올라가 달문(達門)에서 천지를 보는 방법이 있다.    천지의 전경을 볼 수 없지만 천지를 보고 물을 만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 송강하를 지나서 시작되는 서파로 갈 경우 칭스펑(靑石峯)에서 천지를 볼 수 있고, 능성을 따라 달문으로 가는 트레킹 노선도 많이 개발되어 있다.    비룡폭포(飛龍瀑布)는 천지의 물이 달문으로 흘러나와 이른 아름답고 장엄한 폭포다. 중국에서는 창바이푸프(長白瀑布)라 불리는 비룡폭포는 쑹화지앙(松花江)의 근원이 되는 곳이다.      비룡폭포 아래에는 백두산온천은 수온이 82℃까지 치솟는다. 온천 아래에 있는 여행지구 아래쪽에는 소천지가 있다. 천지처럼 크지는 않지만 신령한 기운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소천지에서 산문으로 향하는 길에는 위앤스선린(原始森林)이 있다. 이곳은 백두산 삼림의 다양한 면모를 볼 수 있는 곳이자 삼림욕의 장소인데 놓치는 이들이 많다.    소천지  40분 정도 나무로 만든 숲길을 따라가면 광활한 삼림 지구가 나타난다. 삼림욕이라 생각하고 걸으면 더 없이 아늑한 코스다.    백두산은 사방이 빽빽한 삼림으로 둘러싸여 있고 고목들이 하늘을 찌르고, 구름을 덮고 태양을 막았다 하며 ‘백두산 린하이’(長白山林海)라 부르게 되었다. 사실 일반 여행자들은 시간 때문에 이곳을 여행하는 이들이 많지 않은데 유감스러운 일이다.     글 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 오피니언
    2019-12-12
  • 지안-'동양의 피라미드' 고구려 유적을 만나다
    단둥에서 압록강을 따라 새로 난 길을 6시간쯤 타고 가거나, 선양에서 남만주를 가로지르는 도로로 8시간쯤 동진하면 지안(集安)에 닿는다.    동북지방은 고구려가 처음 도읍했던 도시이자 간도협약 이전엔 우리나라 영토였던 곳이다. 고구려 유적은 우리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곳이다.    그런데 2003년 후반기에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억지 시도를 하면서 한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고구려 유적의 중심지는 압록강변에 있는 지안(集安)이다. 이곳에는 광개토대왕릉비를 비롯해 장군총, 환도성 유적 등 각종 유적이 적지 않다. 원래 고구려는 졸본(현재 환런 桓仁)에 나라를 세웠다.  지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하지만 이곳은 산이 너무 높고 험해 외적의 침입을 막는 데 유리하지만 정치, 경제, 문화 측면에서 도읍지로는 적합하지 못했다. 특히 주변 여러 부족국가들이 강성해지면서 ‘졸본’은 도읍지로 구실을 제대로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지안이었고 유리왕 22년에 천도하게 된다. 지안은 온난한 기후와 풍부한 물자를 가진 곳이었다. 이곳에서 고구려는 얼마간의 영화를 누렸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평양으로 천도하게 된다.    지안의 고구려 유적은 오랫동안 잘 관리되어 오지 못했다. 특히 공산화 이후에 국경 문제를 부담스러워한 중국은 고구려에 대한 우리나라의 관심 자체를 차단하기 위해 적지 않은 공을 들였다. 최근에 역사 문제가 불거지면서 취재 등을 위해 지안을 방문하는 것을 막는 등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지안에서 우선 꼭 들를 곳은 장수왕릉(長壽王陵)이다. 동양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장수왕릉은 장군총(將軍塚)으로 불렸다. 입구에 들어가면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독특한 돌로 쌓은 능의 전면이 보인다.    이 능은 화강암을 정성 들여 가공한 돌로 일곱 층으로 쌓았다. 학계에 따르면 장수왕릉의 방식인 돌무지돌방무덤(積石石室墓)은 대체로 3세기 말∼4세기 초로부터 5세기에 나타나며, 기와를 통해서는 4세기 중엽 이후 5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므로 이 장군총의 연대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추정할 경우 무덤의 주인은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5~413)이나 장수왕(長壽王 394~491) 중의 하나로 본다.   장군총  장수왕릉의 아래에 광개토대왕릉비 및 호태왕릉이 있다. 아버지의 묘가 아들인 장수왕릉의 묘 보다 약간 낮은 곳에 위치해 의심을 받지만 광개토대왕릉비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가장 소중한 자료이자 또 비문의 해석으로 뜨거운 감자가 돼 온 유적이다.    이 비는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長壽王)이 왕 3년(414년)에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당시 수도였던 압록강 유역인 중국 길림성 통화전구 집안현 통구성(吉林省 通化專區 輯/集安縣 通溝城 - 중국 현지에서는 集安縣)에서 동북쪽 약 4.5km 지점의 태왕촌(太王村)에 있다. 비는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의 사면석이나 자연스러운 모습의 긴 바위 모습이다.    태왕릉비   그곳에 처음 들렀을 때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시작되기 이전인 2002년이었다. 중국 내부에서는 이미 동북공정이 한참 준비되어 일체의 동영상 촬영이 금지되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후 광개토대왕릉비는 유리로 된 보호망이 만들어지는 등 곡절을 거쳤다. 근대에 들어서 일본에 의해 비문이 훼손되고, 지금은 중국에 의해 수난당하는 유산을 보는 것은 씁쓸하다.    사실 그 땅에 존재했던 어떤 권력자도 100여년 넘기기 힘든 것을 봐왔던 비석이다. 자신이 주인인양 비문을 훼손하고 곡해하는 후손을 보는 느낌은 씁쓸하기 그지 없을 것 같다.   지안 시내 곳곳에는 국내성의 흔적이 있다. 또 시의 동쪽인 압록강인데 보트 등을 통해 북한 쪽에 접근할 수 있다. 도시의 서북향에는 환도산성이 있다. 과거 관구검이 넘어와 고구려를 위기에 빠뜨린 곳이다. 산성은 복원되어 있는데 성의 면모는 거의 없다. 성 아래에는 고구려 무덤의 집합군인 산성하 무덤군이 있다. 크고 작은 묘들은 과거 고구려의 영화를 한눈에 느낄 수 있게 한다.     글 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 오피니언
    2019-12-09
  • 단둥-한북중이 만나는 동아시아 바로미터
    아마 지금 지구상에 이런 느낌을 주는 장소가 많지 않을 것이다. 낮에 강 위에서 서서 동쪽은 보면 낡은 인민복과 건물들이 마치 1950년대 어느 도시를 연상시킨다.   단둥 시장    반면에 서쪽을 보면 일년도 되지 않아서 스카이라인이 바뀌고, 도시 남북에 신도시들이 생겨난다. 아마 이런 분위기가 가장 생경한 이들이 동쪽에 사는 북한 신의주 사람들일 것이다.  그 도시가 바로 단둥이다. 단둥은 압록강과 신의주를 볼 수 있는 곳이어서 우리나라 여행객들에게는 독특한 감회를 주는 도시다. 1907년 청나라는 이곳을 무역항으로 개방했고, 압록강을 타고 온 물자나 지린성 등지에서 물자들이 모이는 중요한 항구 기능을 하고 있다.    단둥 자체의 여행에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시 중심에서 10분 정도만 걸으면 압록강에 닿을 만큼 가깝다. 유람선을 타고 강 중심으로 갈 수 있는데, 이곳에서 북한 신의주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우선 이곳에 가면 압록강 단교(鴨綠江 端橋)를 만날 일이다. 1911년 10월에 완공된 다리였는데, 1950년 11월부터 1951년 2월까지 진행된 미군의 공습으로 무너졌다. 1993년에 중국은 이 다리의 의미를 바꾸기 위해 단교(斷橋)에서 단교(端橋)로 이름을 바꾸었다. 단교는 끊어져 사람들의 움직임이 없지만 옆 철교는 가운데 기찻길을 두고 양 옆으로 도로가 있어 여전히 북중 물동량 이동의 중심이다.    사실 단둥 시내에는 그다지 인상적인 여행지가 없다. 시내에서 시간이 난다면 시내 중심에 있는 진지앙산(錦江山)의 정상에 있는 캉메이위앤차오지니엔관(抗美援朝紀念館)과 후산창청(虎山長城)정도다.    후산창청(虎山長城)은 과거 고구려의 말단 성이었는데, 마치 창청의 동쪽 끝인양 만들어 역사 조작의 냄새가 난다.   중국의 관점에서 한국전쟁을 해석한 만큼 객관적인 역사교육의 현장이지만 반공교육에 익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낯선 곳이다. 53m의 기념탑과 직경 44m의 원형 극장이 인상적이다. 후산창청은 과거 고구려의 말단 성이었는데, 마치 창청의 동쪽 끝인양 만들어 역사 조작의 냄새가 난다.    여행지로 정비되지 않았지만 역사 마니아라면 우리 사신이 중국으로 넘어올 때 건너던 지우롄청(九連城)도 한번 둘러볼 일이다. 그밖에 단둥에서 좀 거리가 있지만 펑황산(鳳凰山 봉황산)은 고구려의 중요 성 가운데 하나여서 둘러볼 만 하다. 좀 멀지만 남서향으로는 칭산거우(靑山溝 청산구)가 있는데, 북방의 ‘계림(桂林)’으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여행지다. 사실 단둥은 여전히 들떠있다. 남북간 기차가 연결되고 중국까지 이어지면 이곳은 동북아 물류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큰 도시다. 물류는 물론이고 일본, 한국, 북한, 중국으로 이어지는 여행 등 문화교류의 교두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궁 같은 북한을 놓고 벌이는 동아시아 역학 관계의 실타래는 좀처럼 풀리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단둥은 여전히 가장 빠른 개발도시 가운데 하나다. 중국으로서는 뭔가 확신이 없다면 이런 개발이 어려울텐데 그 자신감이 때로는 부담스럽다.    글=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 오피니언
    2019-12-01
  • 동북 지역-우리 민족의 숨결이 느껴지는 백두산 일대
    통화에서 백두산까지는 원래 밤기차가 가장 좋은 교통 수단이었다. 밤에 기차에 올라 잠을 자면 아침에 바이허(白河)역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백두산 입구 산문 하지만 최근에 서파(西坡) 등이 개발되면서 송지앙허(松江河)도 여행 중심지가 됐다. 송지앙허에서 서파는 물론이고 새로 개발된 남파 등으로 가는 여행이 출발한다. 바이허와 송지앙허는 도로가 개통하면서 2시간이면 닿는다.    필자는 다섯 차례 백두산에 가봤다. 대부분 여름이었다. 백두산에 가면서는 우리 민족의 시원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돌이키게 된다. 실제로 백두산을 비롯한 동북 지방의 자연은 우리와 정말 닮아 있어 다른 땅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나야 하는 것은 동북공정이나 백두산 공항 건설처럼 백두산을 창바이산(長白山)으로 만들고자 하는 중국의 다양한 의도나 여행지로 돈을 벌겠다는 의지뿐이다.    이제는 공식적으로 금지된 서파 산행도 있고, 북한쪽 코스도 개발된다지만 조금만 코스를 바꾸어도 백두산 여행은 풍성해질 수 있다. 우선 원시산림으로 불리는 숲 트레킹은 길게 잡으면 두 시간 정도를 숲길을 따라 다녀오는 코스다.  백두산 원시산림  백두산의 숲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므로 조심히 걸으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좋다. 산문을 나와 오른쪽으로 가면 나오는 두만강 발원지, 숭선세관을 지나 허롱(和龍)을 거처 옌지로 가는 길도 두강강의 물줄기를 즐겁게 느낄 수 있는 코스다.    옌지는 200만 조선족의 수도와 같다. 조선족에 의해 행정이 이루어지던 자치주의 중심도시이자 문화, 교육의 중심도시였다. 중국 조선 문화를 만든 데 가장 중심 인물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주덕해 선생이다.    사실 이제 조선족 청소년 사이에서조차 그의 이름을 듣기 쉽지 않은데, 그는 동북에서 항일 운동을 하다가 러시아로 건너가 교육을 받고 와서 옌안에 간다.    그곳에서 탁월한 지도력으로 농업 등에 공을 세우고, 마오는 물론이고 저우언라이와 깊은 친분 관계를 가졌다. 중국에 남은 주덕해는 옌볜 자치주를 만들고, 지금도 중국 유수 대학에 꼽히는 옌볜대학의 전신을 만들고, 소수민족예술단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옌볜 가무단을 만든 인물이다.    그는 문화대혁명 때 저우언라이의 배려로 후베이로 내려가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쓸쓸한 최후를 맞는다. 그의 흔적은 이제 옌볜대학의 뒤에 있는 기념비에서 만날 수 있지만 그곳을 찾는 이들이 많지 않고, 인구의 급속한 감소로 자치주마저 위협다는 상황이라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곳은 100여 년 전 동북 항일운동의 중심지라 그 느낌도 애틋하다. 윤동주, 함석헌, 문익환 등이 공부했던 대성중학의 유적이나 이제는 사라진 선조들의 문화가 살아 있는 옌지의 시장을 돌아보는 것도 독특한 느낌이다. 하지만 백두산 여행이 개방되면서 이곳은 급속히 시장화의 급랑을 타고 있다.    글 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 오피니언
    2019-11-28
  • 동북 지역-압록강 따라 민족의 시원을 더듬다
    압록강은 북한과 중국의 경계를 따라 흘러 내려온다. 필자는 그 강의 대여섯 곳에서 물에 손을 담가 봤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차가운 느낌은 덜하다.    압록강 단교 하지만 물을 담글 때마다 아주 오래전 마을 중앙에 있는 느티나무 가운데 난 옹이 안에 손을 넣는 느낌이다. 수백 년 된 구렁이가 내 작은 손을 콱 물어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 아마 우리 민족의 시원(始原)으로 생각해서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한강, 금강, 대동강 등 한반도를 관통하는 많은 강이 있지만 압록강이 주는 단어의 느낌이 남다른 것은 나만일까. 다른 강들보다는 더욱 푸르고 기운찰 거라는 느낌...    공식적인 압록강 발원지는 함남 풍산군과 신흥군(현 양강 김형권군과 함남 신흥군) 경계에 있는 명당봉(1809m)이다. 반면에 두만강 발원지는 백두산 북쪽 사면에 있는 작은 냇가다.    백두산 산문에서 숭선세관에 가는 길에 있는 두만강 발원지는 불과 북한군 경계병과 1~2m를 두고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대학생이던 일행 중에 몇이 담배를 건너자 별 경계심 없이 받았다.    백두산을 기점으로 북으로는 두만강, 남으로는 압록강이 흘러간다. 그 경계선이 주는 함의는 이제 무겁다 못해 처절하다. 황석영의 <바리데기>에서 나온 순이처럼 많은 이들이 생사를 걸고 이 강을 건넌다.    압록강이 끝나는 곳이 단둥이다. 과거 이름은 안동(安東)이다. 중국이 이곳을 안동으로 부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제목처럼 이곳이 편안한 날이 되기를 기원하는 것일까. 역대로 우리 민족이 중원을 공격한 일이 거의 없으니 그런 소망도 없으련만 일제까지도 이곳의 이름은 안동이었다.    압록강 하구에 단둥의 고층아파트가 들어 서 있다 크게 본다면 우리 땅과 랴오닝 반도가 만든 단동 만을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동서의 차이다. 밤이 되면 동쪽 신의주는 정적에 쌓여서 칠흑같이 어두워진다.    반면에 서쪽인 중국의 단둥은 야간 조명은 물론이고 밤 공사로 훤하다. 과거 철교의 북쪽으로 나 있던 개발구는 남쪽으로 확장되어 새로운 신천지를 만들고 있다.    여행자들은 작은 모터보트에서 대형 유람선까지 다양한 배를 타고 북한 쪽으로 접근한다. 때론 철교 남쪽으로 가기도 하고 북쪽의 한적한 초소로도 갈 수 있다.    여행자들이 북한 쪽에 접근해 손을 흔들거나 말을 걸면 군인들은 대부분 외면하지만 일반인은 우리가 그들을 보듯이 그들 역시 우리를 본다. 물론 그쪽 사람은 거의 바뀌지 않음에 반해 중국 쪽에서 보는 사람은 매일매일 새로운 사람일 것이다.  압록강 하구 북한 주민 빨래를 하고 있다 간간이 써 있는 문구들을 읽으면서 생소한 모습으로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역사에 대한 비감함에 빠지기 십상이다. 북쪽으로는 이성계가 회군했다는 위화도가 있다.    압록강 하류에 있는 이곳을 보면 역사를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그때 이성계가 중원을 향해 진군했으면 어떤 결과가 빚어졌을까. 쉽게 답할 수 없지만 청나라처럼 중원을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히려 중국의 지배만을 확대하는 계기를 만들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든다.    압록강을 따라 북으로 오리는 길은 최근에 정비되어 길이 좋다. 강을 따라가는 길은 느낌이 좋다. 다만 수시로 스치는 북한 쪽의 헐벗은 모습은 행자를 슬프게 한다.    근대 최대의 수력발전소라는 수풍 발전소를 지나면 산지와 평지가 연속되는 지역이 펼쳐진다. 이곳들은 일제가 한국을 병합한 이후 우리 애국지사들이 피신 와서 독립 운동을 펼치던 곳이다.    압록강의 상류에는 고구려 중심도시였던 지안(集安)이 있다. 졸본성(지금의 환런 桓仁)에서 시작된 고구려는 비교적 안정된 지형인 지안으로 천도한다.    지안은 압록강이 있는 남쪽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고구려의 기상을 만난다.    광개토대왕릉비나 장수왕릉 등은 그다지 먼 거리에 있지 않다. 한적한 공간들을 움직이다 보면 역사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다.    점심 시간에 지안에 있다면 지안시를 통과하는 압록강 유람선 선착장 맞은편에 늘어선 불고기 집에서 이곳 특유의 불고기 맛을 봐도 좋다. 고기를 탄불에 굽고, 마늘 등을 넣은 소스에 고기를 찍어 먹는다. 소스는 화학조미료 맛이 강하지만 여행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지안에서 이곳의 교통 요지인 통화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 차가 가는 길은 과거 중국과 고구려의 연결 통로이기 때문에 전술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지금은 터널이 생겼지만 그 길에서 피 흘렸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숙연해진다.    글 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 오피니언
    2019-11-19
  • 꿍거얼 초원-야생화 천국에서 새의 낙원
    꿍거얼 초원 홍산쥔마창에서 작은 길을 따라가면 몽골이 시작되는 고원이 나온다. 이 고원은 필자가 여행 다닌 중국의 경관 가운데 가장 편안했던 곳 가운데 하나다.    산의 등성이를 지나가며 차를 어디에 세워도 아름다운 야생화의 천국이다. 중간 중간에는 여유로운 몽골인들의 가옥이 펼쳐져 있다.    사진가들이 오면 수십 번을 세워 달라고 할 수 있는 곳이지만 우리는 그냥 바삐 길을 재촉했다.  그 길을 2시간쯤 달리면 꿍거얼 초원의 시작지인 커스커텅이 나온다.    제법 규모가 있는 군 정도의 도시다. 그 도시에서 북으로 달리면 오른쪽에는 훈찬타커 사막이 있고, 그 오른쪽에는 꿍거얼 초원이 펼쳐진다.   훈찬타커는 가장 사막화가 빨리 진행되는 곳으로 과거 우리나라에 황사 피해를 주지 않았지만 최근 빈번히 우리나라에 영향을 주는 곳이다. 듬성듬성 펼쳐지는 모래 등성이 사막화가 결코 멀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오른쪽은 초원이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그 중간을 가로지르는 양이나 말떼, 혹은 소떼들. 후허하오터에서 만나던 작은 초원이 아니라 대륙의 평온이 느껴지는 진짜 초원이다.    더욱이 고도가 올라가면서 펼쳐지는 초원의 다양한 풍경은 일행들을 새로운 세계로 이끄는 것 같다. 가끔씩 양떼에 눈을 돌릴 뿐 그들은 마치 샤먼이나 된 듯 자신을 초원에 던진다.    파오는 이동이 편리하도록 천이나 가죽, 나무로 만들어진다   꿍거얼 초원의 한가운데 바이인아오포(白音敖包)가 있다. 이곳은 파오로 만들어진 숙박 지역으로 뒤에는 세계에서도 드문 고산 삼나무 군락이 있다. 그 뒤로 가면 따싱안링(大興安嶺) 산맥이 펼쳐지는데, 이곳이 닥터 노먼 베쑨이 사망했던 곳이다.    파오는 몽골의 전통 주택이다. 이동이 편리하도록 천이나 가죽, 나무로 만들어진다. 칭기즈칸은 이 편리한 주택과 멀리서도 눈에 띄는 아오포(敖包)를 바탕으로 유럽까지 자신의 손 안에 넣었다.    초원의 아침은 역시 청신하다. 일찍 잠에서 깨어 세계에서도 드물게 초원지대에 형성됐다는 삼나무 군락을 살펴본다. 그 군락으로 가는 길에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에서 보이는 것처럼 쓸쓸히 죽어 있는 나무를 만난다. 자신의 뿌리에 있는 흙마저도 몰아가버린 바람의 비정 때문에 나무는 말라 죽었다.    사실 우리들은 지금 소비라는 바람을 통해 지구의 뿌리마저 위협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 소비의 바람은 우리는 물론이고 이제 중국을 광풍처럼 휩쓸고 있다.    꿍거얼에서 씨린하오터(錫林好特)로 가는 길목에 있는 타리후가 있다. 드넓은 초원, 또 1200m의 고도에 만들어진 호수의 모습은 잿빛이다.    네이멍구 4대 호수 중 하나인 타리후 영(靈)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한 번쯤 들렀다 가고픈 곳 같다. 드물게 새들이 날아 멀리서 온 객을 맞아준다. 새들의 낙원(百鳥樂園)은 40㎡의 드넓은 호수에 백조를 비롯해  홍학, 회학, 큰 기러기 등이 노니는 곳이고, 그 신령함 때문에 매년 4월 18일에는 용왕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네이멍구 4대 호수가운데 하나이자, 지앙시 포양후, 바인부르커후와 더불어 중국 3대 백조 호수로 꼽힌다. 호수 입구에는 휴양촌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을 통해 주변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몽골족은 유목 민족이다. 유랑 생활을 하기 때문에 고대의 몽골족은 집을 짓고 허무는 것을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이동할 수 있는 집을 발명했는데, 이를 ‘멍구파오’라고 한다. ‘파오’(包)는 만족어에서 온 것이고, ‘집’이라는 뜻이다. 나따무는 몽골어로 ‘오락’ 혹은 ‘유희’라는 뜻이다. 이것은 몽골족들의 성대한 전통 명절인데, 일반적으로 7∼8월 사이에 진행된다. 그날은 유목민이 전통 의상을 입고 말 혹은 차를 타고 사면팔방에서 모여든다.  씨름은 유목민이 가장 즐기는 체육 항목 중의 하나이다. 몽골식의 씨름은 연령과 체중을 가리지 않는다. 시합이 시작되면 씨름 선수들은 웅장한 도전 음악 소리 속에서 씩씩하게 나선다. 선수가 등장해서 서로 싸우다가 무릎이 땅에 닿은 사람이 패한 것이다.    활쏘기도 몽골족이 즐기는 체육 항목 중의 하나이다. 찡써(靜射)와 치써(騎射) 두 가지로 나누는데, 찡써는 땅에서 쏘는 것이고 치써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쏘는 것이다.   마토우진(馬頭琴)은 몽골족의 수많은 악기 중 가장 민족 특색이 풍부한 악기로, 말의 머리처럼 생겼다. 그래서 ‘마토우진’이란 이름을 가졌다고 한다. 마토우진의 선율은 은은하고 음색은 넓고 아름다워 초원의 은은함과 어우러짐이 있다.   글 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 오피니언
    2019-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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