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출제를 주관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이 지난 19일 전격 사퇴했다. 평가원장이 수능을 앞두고 모의평가 결과 때문에 사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당장 5개월 앞으로 다가온 2024학년도 수능 관리도 비상이지만 '킬러문항'으로 촉발된 이번 사태가 수험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걱정이다.
수험생과 학부모들은 올해 수능이 정상적으로 치러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하고 있다. 학원 등 입시업계에서는 벌써부터 수능 난이도를 예단하기보다 교과서 위주의 중간 난도 문제 풀이에 집중하라는 조언까지 나오고 있다.
이번 사태는 지난 15일 윤 대통령이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으로부터 교육개혁 추진 상황을 보고 받는 자리에서 보고 내용에 포함되지 않은 수능을 언급하며 촉발됐다.
윤 대통령은 "공교육 교과 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분야의 문제는 수능 출제에서 배제해야 한다"며 대통령으로선 이례적으로 수능 출제를 직접 언급했다.
이어 지난 1일 평가원 주관으로 시행된 6월 모의평가가 윤 대통령의 '공정한 수능' 방향을 반영하지 못했다며 교육부는 대입 담당 국장을 경질했고, 출제기관인 평가원이 이를 제대로 이행했는지 감사할 것이라고도 밝혔다.
이른바 '킬러문항', 즉 '교육과정 밖'의 초고난도 문항이 수능에 포함되면서 이에 대비하기 위한 사교육 수요가 점점 더 커지고, 이는 결국 사교육을 잘받는 아이들에게 유리한 '불공정 수능'이 된다는 것이 윤 대통령의 시각인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문제는 수험생들로서는 수능을 불과 5개월 앞둔 민감한 시점에 출제 방향 전환에 대한 지시가 갑작스럽게 나왔다는 점이다.
또 이러한 '공정수능' 지시의 파장이 교육부 담당국장 경질, 평가원 감사, 나아가 평가원장 사퇴로까지 이어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이 대다수다.
윤석열 대통령이 나서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국어 영역 '킬러 문항'(초고난도 문항)을 저격하면서 킬러 문항이 출현한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킬러 문항은 영어 영역 절대평가 전환에 따라 변별력을 확보하기 위한 출제 당국의 불가피한 선택으로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30년째 이어온 수능이 한계에 다다른 것의 방증이라는 시각도 있다. 따라서 킬러 문항의 등장이 수능을 비롯한 대입 체제의 대대적인 개편이 필요한 징표라는 분석이 나온다.
20일 교육계에 따르면 킬러 문항, 특히 국어 영역의 독서 부문 난도가 급격하게 상승한 것은 2010년대 후반이다.
국어 영역은 표준점수 최고점이 시험이 어려울수록 상승하는데, 현 표준점수 체계가 도입된 2005학년도부터 2018학년도까지는 127점∼140점에 그쳐 평이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2019학년도는 역대 최고인 150점을 찍더니 2020학년도 140점, 2021학년도 144점, 2022학년도 149점을 기록하며 어려웠다는 평을 받았다.
지문의 길이는 1990년대와 별반 차이가 없지만, 정보의 양이 많고 생소한 개념이 등장하는 지문이 속속 출현하며 시험 난도가 급격히 상승했다.
역대급 '불국어'로 꼽힌 2019학년도 수능 국어 영역 31번의 경우 과학과 철학이 융합된 지문을 읽고 만유인력에 대한 별도 제시문을 해석해야 하는 문항이어서 고교생 수준에서 풀기 어렵다는 비판이 빗발쳤다.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서강대 교수)이 최근 페이스북에 "어안이 벙벙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는 글을 올리며 개선을 촉구한 문제 역시 2020학년도 수능 국어 영역에서 킬러 문항으로 꼽힌 40번이었다.
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BIS 비율)을 다룬 경제 지문을 읽고 풀어야 하는 문제였는데, 지문에 제시된 BIS 비율 계산식에 따라 비율을 직접 계산해야 풀 수 있어 까다로운 문제라는 평을 받았다.
출제 당국이 2010년대 후반부터 킬러 문항을 출제하며 변별력을 확보한 것은 영어 절대평가 전환과 연관이 있다는 시각이 있다.
정부는 2018학년도 수능부터 영어 영역에서 원점수를 기준으로 90점이 넘으면 1등급을 부여하는 절대 평가를 도입했다. 영어 시험 난이도도 이전보다 쉬워졌다.
주요 과목 가운데 영어 영역의 변별력이 사라지면서 출제 당국이 변별력을 확보하기 위해 기댈 수 있던 영역은 국어 외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만기 유웨이 교육평가연구소장은 "가뜩이나 수학 사교육비가 높은 상황에서 변별력을 확보하기 위해 수학 난이도를 건드는 것은 (한국교육과정평가원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1994학년도 수능이 도입된 지 30년이 흐르면서 대부분 문제 유형이 간파됐기 때문에 킬러 문항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예전 같은 난이도의 문제를 내면 더 이상 상위권의 실력을 판가름하는 역할을 못 한다는 것이다.
한 교육계 관계자는 "교육과정 범위가 줄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수능이 30여년 되면서 대부분 문제 유형이 나왔고 이를 수험생들이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어렵게 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교육계 인사들은 킬러 문항이 대학 교수조차도 풀기 어려워진 것은 문제가 있다면서 이는 결국 수능 체제가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도 내놓는다.
지난달 국가교육위원회가 개최한 '2023 미래 국가교육 대토론회'에서 기조 강연을 맡은 김도연 태재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수능 1등급을 가려내기 위한 고난도 문항·킬러 문항은 꼬고 또 꼬아서 만들기 때문에 전문가도 풀지 못할 정도로 매우 어렵다"며 수능과 같이 시간제한 내에 문제 풀이를 요구하는 평가 방식이 지속되면서 미래교육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최근 몇 년간 이어진 '불수능' 기조는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킬러 문항'을 배제하더라도 변별력 있는 수능이 되도록 하는 것이 당장 올해 수능을 5개월 앞둔 출제진과 교육당국의 최대 관건으로 떠올랐다.
'킬러 문항'을 배제하면 결국 수능이 쉬워진다는 뜻은 아닌지, '물수능' 논란은 어떻게 피해 갈 수 있을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19일 국회에서 열린 '학교 교육 경쟁력 제고 및 사교육 경감 관련 당정 협의회'에 참석해 "(수능의) 적정 난이도가 확보되도록 출제 기법을 고도화하기 위한 시스템을 점검하는 등 교육부 수장으로서 모든 가능한 지원을 하겠다"고 밝혔다.
이 부총리는 "그간 논란이 돼 온, 공교육에서 다루지 않은 소위 '킬러 문항'은 시험의 변별성을 높이는 쉬운 방법이지만, 이는 학생들을 사교육으로 내모는 근본 원인이었다"고 킬러 문항을 직접 저격하기도 했다.
윤 대통령에 이어 이 부총리까지 '킬러 문항' 출제를 겨냥했기 때문에 올해 수능은 물론 당장 9월 6일로 예정된 평가원 주관 9월 모의평가에서도 킬러 문항은 출제에서 빠질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국어 영역 독서 난이도가 하락할 것으로 교육계는 보고 있다. 윤 대통령이 국어 비문학 분야를 예로 들며 과목 융합형 문제 출제는 배제해야 한다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올해 수능에서는 '준 킬러 문항'이 늘어나면서 몇 년 만에 '불수능' 논란은 벗어날 것으로 보인다.
2018년 말 시행된 2019학년도부터 지난해 2023학년도까지 출제된 수능은 비교적 어려운 편에 속했다.
입시업계에서는 시험이 어려울수록 상승하는 표준점수 최고점이 140점 이상일 경우 불수능으로 보는데, 지난해 시행된 2023학년도 수학의 표준점수 최고점은 미적분 145점, 기하·확률과 통계가 각 142점이 될 정도로 어려운 시험이었다.
2022학년도에는 국어(언어와 매체 149점, 화법과 작문 147점)와 수학(미적분·기하 각 147점, 확률과 통계 144점) 모두 '불수능'으로 꼽혔다.
통합 수능 도입 이전인 2021학년도에는 국어(144점), 2020학년도에는 수학 나형(149점)과 국어(140점), 2019학년도에는 국어(150점) 때문에 '불수능' 논란을 피해 가지 못했다.
이 부총리가 이날 "공교육 과정 내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은 출제를 배제하겠다"고도 강조한 만큼, 현재 50% 수준인 EBS 교재와의 연계율이 다시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
국회 교육위원회 국민의힘 간사인 이태규 의원은 이날 "문재인 정권은 수시 확대와 정시 확대를 오가는 혼선으로 입시 안정성을 흔들고 수능과 EBS 연계율을 갑자기 떨어뜨려 학부모와 학생들이 학원으로 달려가게 했다"고 주장했다.
이날 열린 당정협의회에서도 사교육 경감 방안으로 EBS를 활용한 지원을 강화하는 방안이 논의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물수능 논란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는 관건이다. 교육부는 킬러 문항을 배제하면서도 적정한 난이도를 확보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이 부총리는 킬러 문항을 없애도 변별력을 확보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충분히 가능하다"며 "대학 교수도 풀지 못할 정도로 문제를 배배 꼬는 사안이 많았는데, 이런 것들은 정말 없어져야 한다. 그런 문제로 손쉽게 변별력을 확보하는 논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다만 "충분히 좋은 평가자들이 좋은 문항을 개발하면 얼마든지 변별력이 가능하고 이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며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수능을 불과 5개월 앞둔 시점에 나온 이러한 방침에 수험생들의 혼란은 불가피해 보인다.
한 재수생은 수험생 커뮤니티에 "다들 비슷한 성적인데 이제 한 문제라도 실수하면 끝장"이라며 "6월 모평 때 독서도 쉬웠는데 더 쉬워진다는 건가"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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