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실시간뉴스

실시간 기사

  • 창지앙의 중심 우한, 삼국지의 중심 치비
    중국 사람들에게 중국의 중심이 어딘가를 물으면 대부분은 정저우나 우한이라고 대답한다. 두 도시는 남북의 주요도시 베이징과 광저우를 연결하는 징광(京廣) 열차가 통과하는 도시이고, 동서를 관통하는 황허(黃河)와 창지앙(長江)이 지나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저우를 지나는 황허는 강의 기능을 거의 상실한 반면에 창지앙은 그 역할이 오히려 더 커져 상대적으로 우한이 중국의 중심부라는 느낌이 강하다. 때문에 우한은 ‘중국의 배꼽’이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그곳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98년 10월 초였다. 창지앙에 대홍수가 나서 수천 명이 사망한 해였다. 홍수가 끝나고 한달여가 지난 후 수해를 복구하는 중국인들을 취재하기 위해 강가의 작은 마을들을 찾아다닌 기억이 생생하다.    적벽   여기저기 돼지들이 뛰어다니는 마을이나 6명이 함께 자는(?) 초라한 창지앙 여객선에서 만났던 중국인들은 참으로 순박했다. 그 여행은 이후 나와 중국과의 인연을 맺어주는 첫 계기가 되었다.     후베이의 성도이기도 한 우한은 창지앙과 한수이(漢水)로 세 갈래로 나누어진 우창(武昌), 한코우(漢口), 한양(漢陽) 세 지역을 합한 지명이다.    과거부터 창지앙의 중심 도시였고, 산샤 댐의 건설로 창지앙 수운(水運)이 급증하면 그로 인한 적지 않은 반사이익이 있다.    하지만 여행자들에게 우한은 그다지 반가운 곳만은 아니다. 우한은 6월 말부터 9월 초까지는 일반인이 생활하기 힘들 만큼 덥기 때문이다.    밤이 되면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공원에서 잠을 청하고, 광장에서는 각종 공연이 벌어지는 등 나름대로의 여름나기 모습을 만끽할 수 있다.    특히 서양식 건물을 잘 개조해 놓은 페리터미널 앞 거리에 가면 이런저런 먹을거리들과 강에서 수영 등을 하며 즐기는 중국인들을 볼 수 있다.    우한의 최대 번화가는 우한 페리터미널에서 서양식 건물들이 있는 시내 쪽을 볼 때 왼쪽에 있는 지앙한루(江漢路)이다. 이 길을 따라가면 각종 먹을거리들이 있는 작은 가게들이 나오고, 곧바로 중산따다오(中山大道)가 나온다.    이곳은 우한시가 심혈을 기울여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보행 거리로 만든 곳이다. 상하이의 난징루나 베이징의 왕푸징처럼 쇼핑과 다양한 문화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우한의 아침식사는 매우 간편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며 음식에는 남북의 풍미가 풍부하다. 꽈배기, 면, 밀국수, 만두, 쇠고기당면, 자장면, 물만두 등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꼭 맞지는 않아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다.    우한 여행의 상징은 시 중심에 우뚝 솟은 황허로우(黃鶴樓 황학루)다. 황허로우는 우창(武昌) 뱀산(蛇山)에 있는 정자로 중국 3대 명루(名樓)의 하나다.    텅황거와 위용은 비슷하고, 주변의 경치는 웨양루와 비슷해 가장 빼어난 정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에서 창지앙대교(武漢長江大橋)를 비롯한 우한 시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황학루는 시선 이백에게 시를 쓸 의지를 잃게 했을 만큼 명작으로 평가받는 최호(崔顥)의 시 ‘황학루(黃鶴樓)’의 무대가 된 곳이다.   누각이 처음 건설된 것은 223년이었다. 하지만 수차례 화재와 복건을 거듭해 1981년 10월 시 정부가 재건을 시작해 1985년 6월에 완공했다.    콘크리트 조형물로 안에는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되어 고풍스러운 느낌은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멀리서부터 시선에 들어오는 위용과 거대한 창지앙과 어울리는 모습은 명성이 결코 무색하지 않다.      황허로우가 시 중심에 우뚝 솟은 우한의 상징이라면 시 동쪽의 거대한 바다 같은 둥후(東湖 동호)는 우한의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다.    호수의 면적은 33.23㎢로, 항저우(杭州) 시후(西湖)의 6배 가량 된다. 중국 홍군의 총사령관인 주더(朱德)가 ‘지금은 항저우 시후가 더 각광받지만 훗날에는 둥후가 각광받을 것’이라는 말을 한 호수이기도 하다.    앞 두 곳이 여행지의 이미지가 강하다면 꾸이위앤스(歸元寺 귀원사)는 우한 사람들의 생각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사찰이다.    청나라 순치(順治)제 때 만들어져 역사는 깊지 않지만 우한에서 가장 손꼽히는 사찰이다. 꾸이위앤스는 건축미가 빼어나고 안에 조각들도 예술 가치가 높다. 산에는 우한 방송탑이 있는데, 우리나라 남산처럼 회전식당이 있다.    우한은 여행지를 찾아다니기 보다는 지앙한루(江漢路), 톈진루(天津路), 중산루(中山路) 등 번화가를 다니면서 현지인들의 삶을 가까이 느껴보는 것이 더 좋다.    특히 지앙한루 지칭지에(吉慶街)는 흥겨운 거리 예술가들의 거리로 중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여름이면 40도의 기온에 90%의 습도가 보통이기에 사람들은 모두 거리로 나선다.    장사꾼들은 장사꾼들대로 손님을 끌 방법을 찾고, 자신의 재주로 벌이를 하는 이들로 거리는 밤새 분주하다.    나에게 우한은 정감 있는 도시라는 첫인상으로 남아있지만 왠지 크기만 한 도시라는 느낌도 강하다. 그런 느낌을 씻어주는 곳이 웨양루(岳陽樓 악양루)다.    웨양은 행정구역상은 후난에 속하지만 위치는 우한과 창사의 꼭 중간이다. 우한에서 빠른 기차로 3시간 정도면 닿는 곳에 있다.  웨양루에 있는 소교묘   영화 <적벽대전>에서 조조에게 전쟁을 일으키게 한 것으로 묘사되는 소교(小嬌)의 무덤이 그곳에 있어서 더 애틋한 마음이 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웨양루는 중국 3대 누각의 하나로 내륙의 바다인 둥팅후의 한켠에 서 있다. 주 누각의 높이는 3층이고, 높이는 20m다.    웨양루는 삼국시대 오나라 대장 노숙(魯肅)이 수군의 망루로 쓰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역대 문인들이 이곳에 올라 음풍농월하면서 문화 가치가 높아졌다.    중국 3대 누각의 하나인 웨양루   특히 그 가운데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가 유명하다. 그의 시는 ‘세상 사람들이 고통 받기 전에 내가 앞서서 고통 받고, 세상 사람들이 다 즐거워한 뒤에야 나도 비로소 즐거워한다(先天下之憮而憮,後下之樂而樂)’라는 유명한 시구가 들어 있는 명문이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시서비랑, 옛 회랑, 옛 닻 등도 볼 수 있다. 또 누각에서 호수를 바라보는 방향에서 오른쪽에는 여객선 부두가 있다.    이곳에서 둥팅후의 주요 여행지인 쥔산(君山)으로 갈 수 있다. 악양루 오른쪽에는 당대 최고 미인 소교의 무덤이 있다. 언니 대교(손책의 부인)와 더불어 당대 미인이자 주유의 아내다.    제갈량은 조조가 동작대를 세우면서 이교(대교, 소교)를 데려와 놀고 싶다는 말을 끌어내 주유가 적벽에서 싸우도록 부추겼다.    삼국지 적벽대전에 등장하는 주유 장군의 동상   사실 영화 <적벽대전>도 이 부분을 부각시켜 조조가 여자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묘사하는데 이것은 좀 과장된 측면이 있다.    웨양에서 우한 방향으로 조금 가면 삼국지 최대의 싸움인 ‘적벽대전’의 현장인 치비(赤壁)가 있다. 웨양에서 창지앙가를 따라서 80km 떨어졌고, 우창에서 130km 떨어졌다.    워낙에 익숙한 지명이라 이미 테마 여행지로 만들어져 나름대로 삼국지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입구에 들어가면 방통의 처소, 제갈량이 바람을 불게 하던 배풍대, 주유의 상, 지명이 유래한 치비 암각 등을 볼 수 있다.    한 시간 정도를 둘러보면 전모를 볼 수 있는 이곳은 실제로 보면 좀 허전하다는 느낌이 든다. 또 ‘적벽’(赤壁)의 암각이 써 있는 곳에서 바라보면 동력선은 건너가기 조차 힘든 작은 강 밖에 없어 어떻게 저런 곳에서 전쟁을 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물론 창지앙의 모습은 물 흐름에 따라 해마다 다르니 지금으로부터 1800년 전의 모습을 유추하기는 힘들다. 어떻든 저 작은 강에서 소설처럼 수만 혹은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나도 전생에 저 강 속에서 숨을 거두었을지 모른다. 위정자들의 수레바퀴에 깔려 목숨을 잃는 가엾은 민초들의 삶은 늘 안타깝다.  글/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중국여행지 50 저자
    • 오피니언
    2020-08-07
  • 장강… 천하 명승에서 삼국지를 읽다
    중국을 여행하다 보면 <삼국지연의>(이후 삼국지)와 관련된 지명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묘해진다. 적벽, 장판파, 오장원 같은 지명은 중국 역사에 대해 만감을 교차하게 한다.    삼국지의 군사 제갈량의 묘석과 묘   필자는 수차례에 걸쳐 삼국지의 주요 장소를 대부분 다녀왔다. 삼국지 전반부의 주요 장소는 당시 한나라의 수도였던 시안과 뤄양, 조조의 정치 기반인 쉬창(許昌) 등지다.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 치비(赤壁적벽)와 징저우(荊州 형주), 청두(成都), 한중(漢中) 등지가 된다.    삼국지 초반에 판도를 결정한 곳은 조조와 원소가 격돌한 관두(官渡)다. 이곳은 지금 정저우(鄭州)에서 멀지 않은 중무(中牟)에 속해있다.    황제를 볼모로 데리고 있었던 조조는 이 싸움을 통해 절대 강자로 군림한다. 갈수록 기고만장해진 조조는 천하통일을 명목으로 오나라 손권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한다.    2008년 여름에 개봉한 우위션 감독의 영화 <적벽대전>도 이때의 이야기를 근거로 한다. 조조는 수적으로 열세이고 경험도 미천한 손권을 무시하지만 손권은 강동의 기상을 타고난 장수이기도 했다.    또 손권의 옆에는 주유나 노숙 같이 의기가 있는 참모들이 있었다. 거기에 조조의 힘을 약화시켜 천하를 삼분하려는 전략을 가진 공명이 오나라와 호흡을 맞추어 <적벽대전>을 이룩해 낸다.    <적벽대전>의 공간 치비는 둥팅후(洞庭湖)의 한옆에 붙은 곳으로 창지앙(長江)의 한 줄기가 흘러가는 곳이다. 조조는 여기서 참패한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는 그다지 큰 피해가 아니었다고 하지만 이 싸움을 계기로 제갈공명이 말하던 ‘천하삼분지계’가 현실화된다. 이 싸움의 결과, 객으로 이곳저곳 전전하던 유비가 전략 요충지인 징저우(荊州)를 얻기 때문이다.    징저우에서 굽은 강줄기를 타고 조금 상류로 향하면 이창이 나온다. 중소 규모의 소도시에서 지금은 공항까지 있는 중대형 도시로 성장한 곳이다.    이창이 급발전한 것은 싼샤 댐 때문이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댐으로 기록된 싼샤댐은 수위 170m에 육박하는 거대한 댐이다. 이창 너머에 있는 즈구이에서 시작된 댐은 충칭까지 이어지는데 그 중간에 <삼국지>와 관련된 유적이 많다.    우산(巫山)에 조금 못 미친 곳에 공명이 비결을 숨겼다는 공명비가 있었는데, 싼샤 댐에 물이 차면서 그 표식은 사라졌다. 시링샤, 우샤, 취탕샤로 이어지는 산샤와, 우산에서 떠나는 샤오산샤는 중국여행 최고의 풍광 중 하나다.    시링샤, 우샤, 취탕샤의 싼샤를 지나면 바이티청(白帝城)이 나온다. 관우가 죽은 후 이성을 잃은 장비는 장달과 범강의 배신으로 허무하게 죽었고 유비는 더욱 화가 난 상태에서 무리한 전쟁을 일으킨다.    관우와 장비 같은 맹장이 사라진 촉군은 결국 이창 인근에서 육손이 이끄는 오나라군에 패퇴해 쓸쓸히 강을 거슬러 돌아가다가 이곳에서 병에 걸린다.  유비는 이곳 바이티청에서 ‘유비탁고(劉備託孤)’를 남긴 후 죽는다.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면서 ‘자식이 무능하면 정권까지 넘봐도 좋다’고까지 한 파격적 유언이었다.    혹자는 이것이 제갈량을 계속해서 충성의 길로 이끌고 유비와 제갈량 두 사람의 이름을 군신 간의 덕의 상징으로 남게 하는 데 일조했다고도 한다.     바이티청을 지나 한참 가면 장비묘(張飛廟)가 나온다. 용맹하지만 다혈질의 상징인 장비는 후에 운양(云陽)에서 강주(江州, 지금의 충칭)에 이르는 지역을 책임진다. 장비는 천하의 맹장이었지만 치솟는 화를 참지 못해 결국 허무한 죽음을 맞는 비극적 인물이었다.    운양, 강주를 지나서 더 가면 청두(成都)가 나온다. 이곳의 옛 이름은 익주(益州)다. 유표가 징저우를 양보했을 때는 받지 않았던 유비는 유장이 지배하던 익주가 자신의 3국 정립 구상의 바탕이 될 만한 땅임을 파악하고 재빨리 차지해 촉의 정치 중심지로 삼는다.    청두에 가면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삼국지> 관련 장소가 우후츠(武候祠)다. 촉한 소열(昭烈)황제 유비의 묘임에도 무후사로 불리는 까닭은 이곳에 제갈량의 사당이 있기 때문이다.    제갈량뿐만 아니라 <삼국지>의 주요 인물들이 도열해 있는 곳에 제갈량의 이름을 붙인 것은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충성에 대한 보답의 차원이다.     도원결의의 주인공들이 죽자 제갈량은 자신의 미래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감지한다. 물론 촉에는 조운, 강유 같은 명장이 여전히 있었지만, 결핵을 앓고 있는 제갈량은 이것을 마지막 기회로 생각하고 ‘출사표’를 쓴 후 장안으로 향한다.    1차 정벌은 읍참마속의 고통으로 물리치고, 두 번째 원정길에는 그의 목숨이 다한다. 장안으로 가려면 광원, 한중을 거친 후 다시 북진해 오장원을 지나서 동진해야 한다. 이 길은 강가 바위를 뚫어서 한두 사람이 다닐 수 있게 만든 험난한 길이다.    제갈량이 이끄는 군대는 이 길을 지나 광원, 한중에 닿는다. 한중에서 벌인 싸움에서 촉군은 명장 강유의 활약으로 승리하고 다시 한참을 올라가 장안의 눈앞이라고 할 수 있는 오장원에 이른다.    오장원은 지금의 서안에서 서쪽으로 17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다. 거기에 서안까지는 거대한 평원이다. 그러나 제갈량은 오장원에서 죽음을 맞는다.    죽은 후 사마의를 희롱하는 기술(奇術)을 선보였다지만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제갈량을 실패한 정치가로 평하는 후세인이 많다. 하지만 제갈량은 천운이 다하는 순간까지 충성을 다했다.    맞수인 사마의가 조씨 집안에서 정권을 찬탈한 것과 달랐다는 점에서 제갈량은 천고의 충신으로 추앙받을 만하다.  글/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중국여행지 50 저자
    • 오피니언
    2020-07-29
  • 나무춰(納木錯)-르카저 라싸를 호위하는 성스런 호수와 궁전
    나무춰(納木錯)로 향했다. 나무춰는 티베트어로 ‘하늘의 호수’라는 뜻이다. 가는 길에 펼쳐진 협곡의 농원은 송찬감포가 왜 이곳을 자신의 궁전으로 삼았는지를 충분히 인식하게 했다.   협곡으로는 잘 익은 밀밭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외자 기업들의 팻말이 꽂혀 있어 무공해 농업 기지임을 실감시켰다.  나무춰설산   양파징(羊八井)부터는 아름다운 설산들이 펼쳐졌다. 대부분 만년설산이기보다는 단기적으로 내린 비가 기온이 낮은 고산에서 눈으로 바뀐 탓에 만들어진 설산이었다.    당슝(堂雄)을 지나 해발 5000m에 달하는 언덕을 넘자 남초가 나타났다. 하늘호수. 호수는 정말 넓어서 한눈에 다 담을 수 없다. 맑은 날이지만 수평선이 펼쳐진 곳을 우리의 개념으로 호수라고 하기엔 너무 넓었다.    하늘호수 남초   일행은 호수의 한 켠에 있는 섬에 들렀다. 워낙에 고도가 높은 곳이어서 맑은 날씨인데도 가끔은 비가 쏟아졌다. 한 농가에서 몸을 달래고 한참이나 차를 마시자 주인인 듯한 남자가 다가왔다.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보아 하니 6~7명쯤 되는 형제 부부가 장사를 한다.    “너 어디 사람이냐.”  “한국사람. 당신은 장족?”  “아니, 난 라구주(拉枯族, 검은 옷을 좋아하는 소수민족으로 난창지앙 근처에 주로 거주).”  “음, 라구주. 요즘 손님 많이 늘었지?”  “응. 매년 두 배씩 느는 거 같아.”  “와, 부자 됐겠다.”  “좀.”  “아이는 학교 다녀?”  “응, 좀 떨어진 곳에 학교가 있어.”  “다행이네. 그런데 한 식구들이 이거 해서 먹고 사니.”  “응. 그런 거 말고 나한테 좋은 천주가 있는데.”  “그게 뭔데?”  “응, 우리가 신성하게 생각하는 물건이야.”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팔아.”  “그냥 너한테 맞는 것 같아서.”    결국 비슷한 또래의 이 친구는 장삿 속으로 바뀌었다. 필요 없다는 손사래를 몇 번 하다가 적당히 흥정해 샀다. 그래도 꽤 비싼 가격이다.    아내에게 선물한다는 생각에 크게 마음먹었다. 티베트인들은 천주(天珠)를 상당한 보석으로 생각한다. 천주는 유리처럼 된 보석에 다양한 수의 눈(眼)이 있는 보석이다.    드넓은 나무춰의 한 켠에는 이 주변을 연구하기 위한 관측소가 하나 있었다. 사람들을 볼 일이 드물어선지 3명의 연구원들은 우리 일행을 유난히 반갑게 맞았다.    그들은 날로 심각해지는 온난화와 그로 인한 빙하의 변화 등을 관찰한다. 호수의 남쪽을 감싼 니엔칭탕구라산(念靑唐古拉山 7162m)의 주봉은 만년설산이었지만 갈수록 그 모습이 위축되고 있다고 전한다.    티베트 신화에서 니엔칭탕구라산은 연인과 부부의 사랑을 영원히 이어주는 곳이라는 믿음이 있는 가장 영험한 산이다.    또 이 산 속엔 신비한 수정궁이 있는데 그 궁 안에는 수많은 보석이 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하지만 급속한 온난화로 인해 이제 그 신비를 벗겨내야 할지도 모르는 처지가 됐다.    나무춰에 다녀와서 르카저에 들렀다. 가는 길에 한 장족 청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청년은 베이징에서 대학을 다니는 엘리트였는데, 친구들과 라싸에 왔다가 잠시 시간을 내 고향에 들르는 길이었다.  “곧 졸업을 하는데 졸업하면 베이징에 남을 건가요?”  “아뇨. 고향에 돌아올 겁니다. 전공이 경영이니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좋은 대학을 나오니, 그럴 수 있겠네요.”  “확신은 못해요. 다만 고향에 돌아와서 일을 하고 싶어요.”  “칭장철도가 장족들의 발전에 도움을 많이 줄까요?”  “그럴 겁니다. 다만 타지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기 때문에 다른 문제들도 있겠지요.”  “문제라면?”  “제 고향 르카저만 해도 갑자기 타지인이 늘었어요. 발전은 하지만 우리로서는 혼돈이죠.”    다른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티베트 문제에 관해서 더 폭넓은 대화를 하지 못했다. 차 안에는 다양한 사람이 타고 있었기에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눈치가 보였다.  르카저   르카저 가는 길은 훗날 칭장철로가 연결되어 네팔 등 히말라야로 향할 때 경유하는 길이다. 니무(尼木)부터의 길은 협곡과 야루장푸장(雅魯藏布江)이 함께 있어 철도를 놓기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다른 길은 비교적 평탄해 철도를 놓는 데 큰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더욱이 라싸에서 르카저 가는 길은 겨울에도 영하 10℃ 이하로 떨어지는 날이 별로 없이 꺼얼무-라싸 구간에 비하면 휠씬 쉬운 길이다.    결국 기술 부문보다는 경제 효과가 철도 건설을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마오주의자들까지 활동하는 네팔이나 자국의 공산품 생산 능력이 떨어지는 인도가 중국 상품들의 유입을 꺼려 철로를 달갑게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게 문제다.    라싸 노브링카가 달라이라마의 근거지라면 르카저에 있는 자스룬푸스(札什倫布寺)는 판첸라마의 생활 근거지다.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는 환생을 관리하는 중요한 동반자였지만 현대 들어 판첸라마가 중국 정부에 근접하면서 두 라마의 거리는 멀어졌다.    결국 지금은 달라이라마가 지정한 판첸라마와 중국 정부가 지정한 판첸라마가 공존하는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는 티베트의 제정일치를 총괄하는 직위였던 만큼 라마 제도가 문제가 생긴다면 티베트의 역사 붕괴는 엄청나게 빠를 것이 뻔하다.    필자가 도착한 날은 르카저에서도 히말라야 여행 축제가 열리는 날이다. 제법 큰 도시의 곳곳에 장터도 생기고, 산골에 사는 이들까지 특산물을 들고와 파는 한편 도시 구경을 하고 있었다. 현지 안내인의 소개로 자스룬푸를 돌아봤다.    현재 판첸라마는 대부분의 생활을 베이징에서 한다. 달라이라마는 피신을 떠났다고 해도 판첸라마 역시 정치 이슈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거의 볼모와 같은 생활을 하는 셈이다.    자스룬푸는 수도자들이 여전히 많지만 주인은 없고, 죽은 판첸라마들의 영탑만이 그곳의 역사를 말해주는 슬픈 곳이다. 글/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중국여행지 50 저자
    • 오피니언
    2020-07-25
  • 칭장철로 지역-하늘 아래 티베트 마을에 닥친 위기
    저명한 철도 여행가 폴 서로우는 그의 여행기 <중국기행>에서 “쿤룬산맥으로 인해 기차는 영원히 라싸에 가지 못할 것이다”고 썼다.    하지만 칭장철로의 운행으로 그의 이야기는 오류가 됐다. 칭장철로가 개통한 후 베이징, 충칭, 청두, 란저우를 시작으로 상하이, 광저우 등으로 노선이 확대됐다.    티베트 수도 라싸 행 칭장철로   출발한 열차는 1~2일을 달려 티베트 자치구 수도인 라싸에 닿는다. 중국 내지에서 티베트로 연결되는 이 철로 개통으로 엄청난 충격에 빠진 사람은 바로 티베트인들이었다.    필자가 그곳을 찾은 것은 가장 큰 티베트 행사인 쩌방스(哲蚌寺) 짠푸(展佛)를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짠푸는 티베트에서 가장 큰 행사이자 티베트인들의 정신을 모으는 중요한 행사다.    이 행사를 시작으로 쉐툰지에(雪頓節)가 시작한다. 하지만 이 행사의 진정한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는 그곳에 없다.    티베트는 원래 장족(藏族)의 땅이다. 기원전 7세기 중엽 이전까지 라싸는 황량한 초원에 지나지 않았다.  라싸역   그러던 어느 날, 토번족의 수령 송챈 감포가 깨끗한 지취허(吉曲河)에 도취해 이곳에 도읍을 세웠다. 그는 자기 부족의 중심지를 라싸로 옮기고, 산꼭대기에 궁을 지었다.    기원전 641년에는 송챈 감포가 시장 지역을 통일했는데, 당나라에서는 그의 위세에 두려움을 느끼고 문성공주를 그와 결혼시켰다.    중국에서 가장 극적인 삶을 산 것으로 알려진 문성공주는 오행상극(五行相克) 원리를 근거로 큰 절(죠칸)을 지었다.    원래 그녀는 공주가 아니었지만 화번공주의 신분으로 티베트에 갔고, 그곳에서는 성녀로 추앙받을 만큼 위대한 인물이 됐다.    그 후 이곳은 시장의 정치, 종교 활동의 중심이 되었고 중대한 불교 활동도 많이 열렸다.    문성공주가 티베트에 간 이후 장족은 한족과 교류가 활발해졌고, 청나라 이후에는 정치적으로 더 밀접한 관계가 됐다.    특히 강희제 때나 건륭제 때는 청나라가 라마교를 국교로 하면서 판첸라마가 베이징과 러허(지금의 청더)에 방문해 거주하는 등 더욱 밀접한 관계가 됐다.    그런 상황에서 티베트의 운명을 바꿔놓은 것은 중국의 공산화였다. 우회하던 장정군은 티베트를 경유하면서 정치적 유대도 맺었다. 공산화와 함께 정치와 군사에서 현대화에 실패한 티베트는 중국의 영토로 편입됐다.    1965년 중국에서는 천이가 티베트를 방문해 달라이 라마와 회견을 가졌는데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이후 티베트는 중국의 티베트 점령과 달라이 라마 망명 등의 고통을 겪으며 독립을 시도해 왔다.    그러나 티베트의 독립은 아직 이뤄지지 못했다. 오히려 지난 7월 1일, 미국이나 스위스 등 고산철도 기술자들도 손을 내저었던 칭장철로가 개통됨으로써 중국의 티베트 지배력이 더 강화됐다.    라싸. 인구 30만의 이 도시에 철도가 뚫리면서 골드러시를 꿈꾸는 이들이 거대한 짐을 들고 끊임없이 내린다. 라싸 인구는 이미 80만 명을 넘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늘어난 인구는 대부분 쓰촨에서 온 이주민이다.    달라이 라마의 거처였던 포탈라궁   달라이 라마의 거처였던 포탈라궁 앞 광장에는 밝음을 상징하는 호수 대신 중국이 세운 해방기념비가 있고, 그 뒤에는 중난하이의 담장에 버금가는 티베트 정부 청사가 있다. 과거 경복궁을 가로막던 중앙청사와 같은 형상이다.    물론 티베트에 닿는 숭고한 순례자들의 모습은 아름답다. 또 티베트인들의 달라이 라마에 대한 애정도 여전하다.    죠칸사원(따자오스)의 강학터에 있는 달라이 라마의 의자는 천으로 덮여 있지만, 아래에는 생화들이 모셔져 있어 이들의 달라이 라마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있게 한다.    죠칸사원이 그들과 중국의 인연을 튼 문성공주가 가져온 석가모니상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사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역사를 아는 티베트인들은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라싸는 이미 무너져가고 있다. 여전히 수많은 라마교인들이 오체투지로 라싸를 향하고 있고, 그 길에서 숨을 거두지만 그들은 자신의 종착점인 라싸가 어떤 모습인지 과연 알고 있을까.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더 이상 라싸를 ‘신성한 땅(神聖之地)’으로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 2008년 봄에는 승려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일어났고, 중국 정부는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글/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중국여행지 50)
    • 오피니언
    2020-07-18
  • 타이산(泰山)-도교의 사상을 품은 세계문화유산
    기찻길로 1,463㎞인 베이징과 상하이 간은 대부분 평지다. 그런데 중간에 우뚝 솟은 하나의 산이 있다. 바로 타이산이다.   태산 정상 전경   우리에게 낯익은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의 태산이 바로 타이산이다, 거대한 중원에 우뚝 솟았기에 산 자체의 아름다움은 차치하고,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그곳에서 신(神)은 물론이고 인간의 다양한 사상까지 찾고자 했다.   타이산은 중국 도교의 명산을 가리키는 오악(五岳) 중 하나다. 해발 1,545m로 그다지 높지 않다. 다만 평지에 가까운 위치에 유독 솟아 있어서 상대적으로 높게 느껴진다.    타이산은 중국 도교의 명산을 가리키는 오악(五岳) 중 하나다   세계자연문화유산이기도 한데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 모두 적당하여 봄철 새벽 경치, 여름 일출, 가을 단풍, 겨울 운치, 각각 그 특색을 지니고 있다.    타이산은 경치 자체가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산이 주는 기운은 만만치 않다. 그 때문에 황제부터 일반인들까지 타이산의 신을 찾는다.     중국 속담에는 '지난푸(濟南府)는 사람이 많고, 타이안푸(泰安府)는 신이 많다'라는 말이 있다. 타이산 신들 가운데 가장 이름난 신은 동악대제(東岳大帝), 벽하원군(碧霞元君)과 태산석감당(泰山石敢當)이다.    동악대제는 태산 신을 말하며 봉선 활동의 직접 산물이다. 진나라에서 당·송에 이르기까지가 그의 흥성 시기에 달한다.    송나라 이후 벽하원군(碧霞元君)이 차츰 태산 신의 맹주 지위를 차지하였고, 산꼭대기 위의 비시아츠(碧霞祠)에 살며, 인간의 명(命)을 주관하였고, 점점 발전하여 인간의 부귀와 화복을 관장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병과 재난을 구원해 주고, 소원을 들어주는 만능 여신으로, 사방 먼 곳에서 온 신도들에게서 추앙을 받았다.    태산석감당은 사람들이 요괴를 물리치기 위해 만들어낸 용맹한 신이다. 당·송나라 이래로, 사람들은 종종 문 앞, 방문 앞, 골목 입구, 다리 입구 등 중요한 위치에 돌을 세우고, 돌 위에 ‘태산석감당’이란 글을 새겨 놓고, 복을 기원하고 화를 면할 수 있기를 기원하였다.    이러한 풍습은 중국 국내에 넓게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동남아, 일본 등지로도 전파되었다.    타이산 노인봉   타이산의 주된 등산로는 홍먼에서 중톈먼을 거쳐 난톈먼까지 오르는 길이다. 홍먼에서 중톈먼까지는 계단으로 걸어갈 수도 있고, 톈와이춘에서 운행하는 버스를 탈 수도 있다.    중톈먼에서 정상 부분의 시작인 난톈먼까지는 역시 계단 길로 걸어 올라가는 방법과 케이블카를 타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걸어서는 2~3시간, 케이블카로는 20분 내외다.    홍먼에서 걸어 올라가는 것을 바탕으로 했을 때, 타이산 입구 다이종팡(岱宗坊)에서 시작하여 난톈먼(南天門)에 이르기까지 전체 길이는 10.5km로 걸어갈 경우 약 4∼5시간의 등반 시간이 소요된다.    길 양편을 따라 비석이 즐비하며 고적과 명소가 다양하고 풍부하다. 공자는 “태산에 오르면 천하가 작아진다”는 말로 타이산의 기풍을 말했다.    진시황은 태산의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한 후 그 나무에 ‘오대부(五大夫)’라는 작위를 내렸으며, 여동빈(呂洞賓)과 왕모(王母)가 해안을 사이에 두고 도술을 부려 싸웠던 곳이기도 하다.   타이산은 사시사철 일출을 보려는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는데, 일출은 위황딩 부근 르관펑(日觀峰)의 꽁베이스(拱北石) 부근과 주변이 중심이다.    일출 시각은 우선 그달 11일을 기준으로 1월부터 07:15, 06:55, 06:20, 05:35, 04:59, 04:43, 04:52, 05:16, 05:41, 06:05, 06:35, 07:04에 해가 뜬다. 1일과 21일과는 각각 11일을 기준으로 15분쯤 차이가 난다.    구체적으로 중요한 곳을 살펴보면 등산로 첫머리인 홍먼(紅門 홍문 一天門)이 있다. 타이산 중루(中路) 여행길의 시작점이다. 홍먼궁의 앞에는 삼중 석방이 있다.    문 옆에는 천하기관(天下奇觀)이라는 글과 반로기공처(盤路起工處)라는 글자가 있다. 또 중간에는 공자등림처(孔子登臨處)라는 석방이 있다.   중톈먼(中天門 중천문)은 버스로 올라가 케이블카를 탈 때 만나는 타이산 등산의 중심이다. 버스로 올라갈 때, 끝 지점이자 난톈먼까지 운행하는 케이블카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난톈먼(南天門 남천문)은 타이산 등산로가 마무리되고, 정상 부분이 시작되는 곳이다. 해발 1460m 지점으로 물론 이곳부터 적지 않은 계단이 있지만 내리막도 있고, 정상 부분이 펼쳐져 마음이 여유로운 곳이다. 케이블카의 정상 도착 지점이기도 하다.    삐샤츠(碧霞祠 벽하사)는 위황딩으로 가는 길에 있으며, 타이산 여신인 벽하원군(碧霞元君)의 사당이다. 송나라 때인 1009년 때 만들었으며, 건물군은 고대 건축 양식의 백미로 불릴 만큼 빼어나다.    이곳에서 조금 오르면 암각화들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 오악독존(五岳獨存)이라는 암각은 명필로 특히 유명하다.     위황딩(玉皇頂 옥황정)은 타이산 정상이다. 과거에는 타이핑딩(太平頂)이나 톈주펑(天柱峰)으로 불렸다. 위황딩은 도교의 중심 신인 옥황상제 등을 모시는 곳으로 도교의 근원지인 타이산을 상징하는 곳 가운데 하나다.    다이먀오(岱廟 대묘)는 타이산 아래 도시인 타이안시에 있다. 진시황 이후 72명의 제왕이 태산에서 하늘에 고하고(封) 땅에 알리는(禪) 제사를 올렸던 곳이다.    북송대부터 지어진 건물군은 이곳이 중국 3대 전각(구궁 太和殿, 취푸 大成殿)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다이먀오의 시작은 첫 문인 정양먼(正陽門)에서 시작된다. 이곳은 타이산의 여신인 벽하원군을 모신 곳으로 타이산 정상 삐샤츠와 대구를 이룬다.    정양문을 지나 정원의 오른쪽을 보면 한무제가 심었다는 전설이 있는 수령 2000년의 측백나무 5그루가 있다. 다시 중심 통로로 와 페이톈먼(配天門)을 지나면 런안먼(仁安門)이 나온다.    원대인 1266년에 런안먼은 보관 상태가 좋은 건축물이다. 런안먼을 지나 오른쪽으로 역대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행한 후 남긴 기록인 석비들이 세워져 있다.    다시 중앙로로 나와서 나아가면 주 건물인 톈황뎬(天見+兄殿)이 나온다. 높이 22.3m, 가로 48.7m, 세로 19.8m인 톈황뎬은 봉선의식을 모실 때 주 건물로 송대인 1009년에 세워졌다.    내부 동쪽 벽에는 태산신에게 제사 지내러 온 모습을 그린 태산신계필회란도가 그려져 있다.    톈황뎬의 뒤쪽으로는 황제들과 일행이 머물던 숙소와 구리로 만든 정자인 통팅(銅亭) 등이 있다. 통팅의 주변에는 분재를 전시한 곳이 있고 더 나가면 후짜이먼(后宰門)이 있다.     글/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 오피니언
    2020-07-13
  • 칭다오(靑島)-최고의 맥주를 탄생시킨 낭만과 축제의 도시
    칭다오는 아름다운 해양 도시로 100년 역사를 가진 맥주로 잘 알려진 도시다. 칭다오를 즐겁게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맥주축제다.    칭다오 야경     보통 8월 중순에 시작되어 말에 끝나는데 이때는 호텔 잡기도 힘들 정도다. 7월에는 해양 축제가 열린다. 보통 12일경에 시작해 31일에 끝나는데 역시 중요한 행사다.    4월에는 라오산 등산축제나 국제 연날리기 축제도 열린다. 칭다오는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해 민박 등의 인프라도 잘 구축되어 있는 장점이 있다.    칭다오를 여행할 때 꼭 가볼 만한 곳이 샤오위산(小魚山)이다. 이곳은 칭다오 중심부에 있는 산으로 꼭대기에 전망대가 있다.    여기서 보면 사방으로 아름다운 칭다오의 전경이 보인다. 붉은 빛의 독일식 건축물, 맑은 해수욕장, 잔치아오 너머로 펼쳐진 빌딩숲의 조화가 칭다오에 대한 좋은 인상을 준다.    쟌치아오(棧橋 잔교)는 칭다오의 상징으로 푸른 파도 위의 용같이 생겼는데 북쪽 타이핑루에서 440m 뻗어 있다.    제일 끝은 회란각으로 그 자태가 마치 위엄스런 용머리 같고, 1891년에 건축된 구시화물 부두는 몇 번의 수리를 거쳐 오늘날 칭다오의 상징이 되었다.    현재 쟌치아오는 소형 전람관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미술, 촬영 등 기타 예술 전람을 자주 개최하고 있다.   샤오칭다오(小靑島 소청도)는 쟌치아오와 함께 칭다오의 주요 상징으로 소라처럼 생긴 작은 섬이다. 물과 섬이 연결되어 쟌치아오와 동서로 바라보고 있다.    섬의 모양이 가야금처럼 생겨서 ‘친다오(琴島)’라고도 불린다. 섬 위에는 하얀 등탑이 있는데 이것은 20세기 초 독일 사람이 건축한 것이라 한다.    이곳은 본래 해군 관할 구역이었는데 1980년대 이후 지방 관리에 넘겨주어 샤오칭다오공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안에는 벚꽃, 석류, 무궁화 등이 잘 심겨 있다.    디이하이수이위창(第一海水浴場 제일해수욕장)은 칭다오 제1해수욕장은 수만 명이 동시에 수영을 할 수 있는 곳이다. 해변가 주변에는 각종 편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해수욕과 동시에 멋진 풍경을 구경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외에 남부 해안에 제2해수욕장, 제3해수욕장, 제6해수욕장, 스라오런해수욕장 등이 해안선을 따라 펼쳐져 있다.    중산공위안(中山公園 중산공원)은 칭다오에서 가장 잘 정비된 공원이다. 짙푸르고 무성한 잔디가 80만m2에 달한다.    공원 내에는 작은 서호, 이공호, 화분원, 어린이공원 등이 있으며 2만 그루가 심긴 벚꽃도로는 4~5월이면 여행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칭다오궈지피지우청(靑島國際틁酒城 청도국제비주성)은 2003년으로 100년 역사를 가진 칭다오 맥주의 전시장이다.    매년 8월 말에 맥주축제를 여는데, 중국 전역에서 사람이 몰려 정신이 없을 정도다. 맥주 축제 동안의 방문객은 줄잡아 200만 명 수준. 평상시에서 맥주 전시관을 볼 수 있고, 안에 있는 바들에게 맥주를 즐길 수 있다.    현재는 스라오런(石老人 석노인)은 칭다오 동부 해안을 따라가면 아름다운 황금해안에 있다. 도시와 달리 조용하고 한적한 가운데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이곳은 단체 관광, 휴가, 비즈니스, 회의 등 다양한 기능을 갖춘 휴양지이다.    주변에는 피지우청, 하이양공위앤 등의 위락 시설이 갖춰져 있으며 길이가 약 2km의 천연 해수욕장이 있다.    라오산은 산둥반도 서남쪽의 칭다오 시 동쪽에 있는 산으로, 화강암으로 조성되어 있다. 주봉(主峰)의 높이가 1133m로 동쪽은 라오산 만이고 남쪽은 황하이(黃海)다.    기봉들이 바다를 이루고 산, 바다, 삼림, 하늘이 함께 어루러져 ‘해상명산제일’로 불린다. 유명한 도교 성지이기도 하다. 고대인들은 ‘신선의 저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라오산 주변의 해안선은 모두 87km이며 해변 주위의 섬들은 모두 18개이다. 옛말에 “태산의 구름이 아무리 높아도, 동해의 라오산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라오산은 산광해색(山光海色), 도교명산(道敎名山)이라는 말이 있다. 송·원나라 때, 사원이 많이 만들어 도교의 명산이 되었다.    지금도 상칭궁(上淸宮), 샤칭궁(下淸宮), 타이핑궁(太平宮), 화러우궁(華樓宮) 등이 남아 있다. 치유추지(邱處機), 장산풍(張三豊)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도인들이 이곳에서 수련했다는 말이 있다.    매년 5월 16일부터 22일 동안 라오산 북쪽 주택 단지에서 큰 규모의 앵두파티가 있다. 15위안만 내면 마음대로 앵두를 따서 맛볼 수도 있다.    라오산베이지우수이호   그밖에 산촌의 특색 음식을 제공한다. 베이지우수이(北九水 북구수)는 라오산 6대 지역 중의 하나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샘의 물줄기가 아홉 단계로 되어 있어서 이름을 얻었다    베이지우수이는 ‘내구수’와 ‘외구수’로 나누어지는데 외구수의 총길이는 6.5km, 내구수는 3km로 차량 진입이 가능하다.    글/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 오피니언
    2020-07-08
  • 산둥 지역-우리와 닮은 여행 천국
    산둥반도는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땅이다. '백령도에서 닭이 울면 청산토우(成山頭)에서 들렸다'는 말이 있다.    칭다오(靑島) 야경   과연 그럴까. 구글 어스를 실행하고 백령도와 청산토우의 거리를 재보니 178km다. 사실 닭 소리가 들렸을 리는 만무하지만 바람이 빠른 때면 무동력선이라고 해도 한나절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다.    산둥은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가깝다. 거리로만 가까운 것은 아니다. 문화적으로도 가깝다. 중국 내에서 아직까지 유일하게 남성 우월주의를 가진 중국 지역이 바로 산둥이다.    때문에 산둥 남성들은 다른 지역 여성에게 홀대받지만 반면에 그 카리스마로 장가를 잘 들기로 유명한 곳도 산둥 사람들이다.    또한 우리나라와 섭생이 비슷해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농산물이나 과일, 수산물의 대부분은 산둥에서 온다. 또 우리나라에 건너온 화교들의 대부분도 산둥 사람들이다.    베이징의 자장면은 갈색으로 장도 우리나라와 상당히 다른 반면에 산둥성의 자장면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맛이 난다. 산둥에서 건너온 이들이 자장면을 만들었기 때문에 산둥성의 맛과 닮았다.    산둥에 첫 발을 디딘 것은 2000년 봄이다. 우리 부부는 따리엔을 여행하고 밤배로 보하이만을 건너서 웨이하이 항에 닿았다.    당시만 해도 웨이하이에서 큰 볼거리는 류공다오 정도밖에 없었다. 우리 부부는 그것을 보고, 국도를 따라 옌타이로 향했다.    지금은 좀더 빠른 길이 있지만 당시에는 대부분 해안에서 멀지 않은 곳을 지나는 국도가 있었다. 여행을 좋아하고 바다를 좋아하는 우리 부부는 창밖으로 펼쳐진 해변길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훗날 이곳에 집을 짓고 살자고 다짐했을 정도다. 이후 방송 제작 등으로 이곳을 수시로 찾곤 했다. 이제 웨이하이는 지역마다 색깔을 갖고 대규모 주택 개발을 하고 있다.    옌타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웨이하이로 가는 길목에는 신도시가 개발되어 시청 등이 옮겨지고, 하루가 다르게 발전을 하고 있다.    가깝다고 여행 자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산둥은 15만 3000㎢로  우리나라보다 약간 크다. 인구는 9000만 명을 넘겨 우리나라의 두 배에 달한다.    산이 별로 없고 평지가 넓으니 당연히 농업 중심으로 인구가 많다. 이 넓은 땅과 인구는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중심도시는 지난(濟南)이지만 여행의 중심도시는 바닷가에 있는 칭다오(靑島)다. 칭다오는 중국의 동해로 조수간만의 차도 크고 물이 맑다.    산둥반도를 따라 위로 가면 하이양(海洋), 스다오(石島), 롱청(榮城), 웨이하이(威海), 옌타이(煙臺), 펑라이(蓬萊) 등 해안도시들이 펼쳐진다. 내륙으로는 중국 도교 명산 타이산(泰山)과 공자의 고향인 취푸(曲阜)가 있다.    산동여행이 행복한 것은 중국으로 가는 교두보로 삼기에 좋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여객선이 운행되는 산둥의 도시들은 옌타이, 웨이하이, 롱청, 스다오, 칭다오, 르자오로 6곳에 달한다.    또 지난, 칭다오, 웨이하이, 옌타이는 하루에 각기 2편에서 10편에 달하는 항편이 개설되어 있다. 항공 요금도 뱃삯에 버금가는 10만원대가 흔한 곳이 산둥이다.    또 칭다오는 항공이 발달했고 지난은 기차가 발달해 중국 어디로든지 갈 때 중요한 거점이 되는 곳이다.    산둥은 여행 자원도 풍부하지만 가장 즐거운 것은 먹을거리도 풍부하다는 것이다.    바닷가 도시들은 중국 8대 요리에 들어가는 산둥요리의 시작점이다. 특히 옌타이는 전복, 해삼 등 바닷가 고급 재료들이 풍부한 곳으로 미식가들을 행복하게 하는 곳이다.    글/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 오피니언
    2020-07-02
  • 웨이하이(威海)-한국과 가장 가까운 산둥반도 끝자락
    산둥반도 동북쪽에 위치하는 웨이하이는 바다 옆에 있어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도교(道敎) 분파 가운데 상당히 번성한 천전파(全眞派)의 발상지며, 청일전쟁의 전장이 됐던 곳이다.    웨이하이시의 해변에는 명승과 휴양지 등이 많이 있다. ‘하늘의 끝’이라고 불리는 롱청산토우(榮成山頭)는 진시황이 동쪽에 가서 장수 약을 구했다는 곳으로 유명하다.    청산토우(成山頭 성산두)   롱청(榮成)에 있는 톈어후(天鵝湖 : 백조의 호수)는 중국 북부에 있는 최대 백조 서식지로 백조의 낙원이다. 해마다 겨울이 되면 여기에 모이는 백조가 1만여 마리에 이른다.    류공다오(劉公島 유공도)는 웨이하이 바닷가에서 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동서 4km, 남북 1.5km의 작은 섬이다. 최고봉의 높이는 153.5m다.    중국 해군에게는 가장 중요한 방어 기지로, 청일전쟁 때는 이곳을 기점으로 치열한 해전이 벌어졌다. 물론 이 전쟁에서 청군은 패했고, 이후 중국인들에게는 치욕적인 장소이자,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는 장소가 됐다.    안에는 갑오전쟁박물관(甲午戰爭博物館 청일전쟁을 중국은 갑오전쟁으로 부름) 등이 있다. 우리나라 여행객에게는 그다지 볼거리가 있는 곳은 아니다.    청산토우(成山頭 성산두)는 산둥반도의 끝자락에 있는 곳이다. 진시황제가 불사약을 구하러 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우리나라와는 94해리(174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중국에서는 태양이 떠오르는 곳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기도 하다. 아름다운 섬 하이루다오(海驢島)를 비롯해 시황먀오(始皇廟), 친다이리스(秦代立石), 빠이르타이(拜日臺), 친치아(秦橋) 유적, 왕하이팅(望海亭)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톈어후(天鵝湖 천아호)는 세계 최대의 백조 서식지다. 청산토우에서 멀지 않은 청산웨이전에 있으며, 11월부터 4월까지는 1만여 마리의 백조와 수만 마리의 철새들이 장관을 이룬다.    이곳은 상하이의 자본이 투자되어 수영, 바다요리 전문점 등 대형 오락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사실 웨이하이는 인상적인 여행지라기보다는 해변 휴양도시에 가까웠다. 그런데 치산파화위앤(赤山法華院 적산법화원)이 생기면서 중요한 볼거리가 생겼다.    산둥 반도는 우리나라와 가까워 과거부터 적지 않은 교류가 있었고, 지금도 적지 않은 곳에서 그 흔적을 느낄 수 있다. 대표지 중 하나가 치산파화위앤이다.    불교신자였던 해상왕 장보고는 820년경 롱청(榮成) 스다오전(石島鎭) 시처지엔춘(西車間村) 적산(亦山) 언저리에 불교사원을 세운다.    당나라에게도 적지 않은 힘을 가진 그는 세를 받을 수 있는 장전(莊田)을 바탕으로 이 절을 운영했는데, 그 수확량이 500석에 이를 정도였다.    당시에 신라승원으로는 가장 큰 이 사찰은 당시 산둥반도 일대에 살던 신라인들의 신앙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마음의 고향이었으며 정보의 교환처이기도 했다.    장보고 동상   또 신라와 당, 일본 3국을 잇는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장보고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절도 쇠퇴했는데, 롱청의 한 수산회사가 종합 문화단지로 재정비했다.    글/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 오피니언
    2020-06-15
  • 옌타이(煙臺)-산둥요리의 시작점인 풍성한 바닷가
    옌타이는 산둥반도 끝자락을 위치한 천혜의 항구 도시 가운데 하나다. 필자는 이곳을 중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처럼 비교적 사계절이 뚜렷한 날씨다. 동으로는 각종 농산물은 물론이고 사과, 배, 포도 등의 중국 최대 주산지다.    옌타이 시내 전경   바다를 끼고 있어 전복, 해삼 등 귀한 해산물이 사시사철 물올라 있다. 때문에 내 옌타이 친구들도 넉넉하기 그지 없다.    산둥요리의 발상지 답게 그윽한 풀코스로 방문자를 맞아주고, 옌타이에서 생산하는 바이주(옌타이꾸냥), 포도주(장유), 맥주(옌타이피주) 등으로 끝장을 보고 마는 것이 이들의 문화다.    옌타이 시는 명나라 때부터 만들어진 도시인데, 주된 목적은 수도인 베이징 방향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한 방어 진지의 역할이 컸다.    옌타이의 앞쪽은 진시황이 세 번이나 들렀다는 즈푸따오(芝묀島)가 돌출되어 있으며, 주변으로 양마다오(養馬島), 창다오(長島) 등 아름다운 섬이 자리하고 있으며 펑라이꺼(蓬萊閣) 등 인문 유산도 있다.    또 이곳은 기후가 좋고 토질이 좋아서 사과나 배, 대추 등 과일이 풍부하다. 특히 옌타이 포도는 질이 좋아 포도주의 원료로 각광받는다.    중국 내 포도주 회사의 대표격인 장유(張裕)나 창청(長城) 등의 주요 생산 기지는 옌타이에서 펑라이꺼로 가는 주변에 위치해 있다.  옌타이산공위안(烟台山公園 연대산공원)은 시의 중동부에 있다. 옌타이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1398년에 이곳에 포대를 설치하면서 군사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왜구들이 침입할 때, 중요한 방어 기능을 한 곳이다. 1861년부터 옌타이가 개방되면서 공원의 주위에는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의 영사관이 세워졌다.    이와 더불어 교회와 우체국도 세워졌다. 산의 중심부에는 등대가 있다. 옌타이산 입구의 오른쪽으로는 옌타이 제 1해수욕장이 있다.    지에팡루(解放路) 해수욕장 입구 쪽에는 옌타이가 자랑하는 장유(張裕) 포도주 회사의 옛 공장터가 있다. 이곳은 현재 포도주박물관으로 바뀌어 이곳의 포도주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양질의 포도주를 비교적 낮은 가격에 살 수 있다.  옌타이에서 해안을 따라가면 만나는 펑라이거(蓬萊閣 봉래각)는 옛날부터 ‘선경(仙境)’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황허로우(황학루). 웨양루(악양루), 텅왕꺼(등왕각)와 더불어 중국 4대 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펑라이거(蓬萊閣 봉래각) 해안   전설에 따르면 한무제(漢武帝)가 펑라이를 보러 몇 번이나 산둥반도에 가서 보하이(渤海) 중에 돌출된 산을 올라서 선경을 찾았다 해서 후손들은 단야산(丹崖山)을 펑라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만리장성처럼 긴 성벽이 섬을 에워싸고 있으며 펑라이거에 오르면 앞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당대에는 용왕궁과 미타사가 만들어지고, 명대에도 중수됐다. 펑라이거는 중국 민간 설화 가운데 유명한 ‘팔선과해(八仙過海)’가 만들어진 곳으로도 유명하다.  아직 외국인에게 공식 개방되지 않은 창다오(長島 장도)는 산둥의 제주도로 불릴 만한 곳이다. 안개가 자욱하고, 바다 위 보석 같은 검푸른 색의 섬 사이에 끼어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에게 해상의 신산으로 불리는 ‘먀오다오췬다오(廟島群島)’다. 창다오는 옛날에 ‘먀오다오췬다오’ 혹은 ‘창산례다오(長山列島)’라고 불리기도 했다.  글/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 오피니언
    2020-06-09
  • 취푸(曲阜)-지성과 야성이 넘치는 공자의 고향
     취푸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의 유명한 사상자이자 유교 창시자인 공자의 고향이다.    공자묘석   이곳은 공자와 맹자가 주도한 유교 문화 발상지다. 취푸는 둘레 약 5.5km인 현성(縣城) 성벽 안에 공먀오(孔廟), 공푸(孔府), 공린(孔林), 루궈구청(魯國古城) 등이 있다.    공먀오, 공푸, 공린은 ‘산공’(三孔)으로 불리는데 현대 들어서 홀대받던 공자를 부활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매년 9월 26일부터 10월 10일까지는 대형 축제인 ‘공쯔원화지에(孔子文化節 공자문화절)’을 열어 공자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한편 관광 수입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취푸는 여행 관리가 부실해 인력거꾼의 호객을 피해야 하는 난점이 있다. 꼭 봐야 할 공먀오나 공린을 요청하면 십중팔구는 엉뚱한 곳에 데려다줘 입장료를 낭비하게 만든다.  공먀오(孔廟 공묘)는 공자의 제를 드리는 사당으로, 노나라 애공(哀公)이 공자가 죽은 지 2년 후(기원전 478년) 공자의 의관을 안치해 놓고 제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유래됐다.    현존하는 공먀오는 명·청대를 거치면서 완성된 것으로 황궁에 버금가는 넓은 면적을 자랑한다. 특히 청나라 옹정제는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현재 공먀오는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공자 사당의 총본산이다. 입구에서 세 갈래 길로 되어 있는데 넓이 140m, 길이 630m를 서서히 걸어가면서 그 위용을 볼 수 있다.    460칸의 건물에 패방은 54개에 달하며, 황제가 만든 석비가 13개에 이른다. 공먀오의 여행은 보통 진셩위전방(金聲玉振坊)에서 시작한다. 이 패방을 들어서면 고풍스런 공먀오가 나온다.    다음 문이 링싱먼이다. 링싱먼은 명(明) 영락 13년(1415년)에 세운 것인데, 청나라 건륭제가 나무 기둥을 돌기둥으로 바꾸고 직접 편액을 썼다.    영성은 공자를 가르킨다. 이후 성시먼(聖時門), 홍다오먼(弘道門) 등을 지나면 쿠이원꺼(奎文閣)가 나온다.    공먀오의 도서관 격인 쿠이원거는 송(宋)대인 1018년에 만들어진 건물로 높이 23.35m이고, 건물의 규모나 구조면에서 빼어나 중국 건축의 중요한 문물 가운데 하나다.    원래는 도서관의 기능을 했는데, 문화대혁명 당시 많은 자료가 소실됐다. 쿠이원꺼를 지나면 공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명인들이 남긴 것이다.    가장 유명한 비석은 대당고승태사노국공선공비(大唐誥僧泰師魯國孔宣公碑)다. 이곳의 가장 큰 돌비석은 65t으로 베이징의 시산(西山)에서 600명의 인부와 500마리의 소가 동원되어 운반한 것이다.    다시 중앙로로 나와 걸으면 따청먼(大成門)이 나온다. 이 문은 공자의 제사 때만 열리고, 황제만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따청먼을 나오면서는 화려한 석각의 기둥들을 볼 수 있다.    황제나 왕이 아니면서도 용의 문양을 쓸 수 있는 공자의 위상을 볼 수 있는 것들로, 조형미가 빼어나다.    따청먼을 나오면 바로 나오는 곳이 싱탄(杏壇 행단)이다. 이곳은 공자가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곳으로 우리나라 성균관에 있는 행단도 이곳에서 비롯된 것이다.    싱탄의 다음에는 본전인 따청뎬(大成殿)이 있다. 중국 3대 전각 중에 하나인 따청뎬(大成殿)은 동서 너비 54m, 남북 안길이 34m, 높이 31.89m, 건축 면적 1,836m2로 청나라 때인 1730년 개축되었다.    3만 명 이상의 목수가 동원되어 6년 동안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흰 돌로 된 2중 기단 위에 노란 유리기와를 이은 2중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안에는 공자상이 있고, 왼쪽에는 안회(顔回)와 자사(子思)가, 오른쪽에는 증삼(曾參)과 맹자(孟子)의 상이 있다.    공자는 안회를 제자지만 같이 학문과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진정한 친구로 여겼다. 하지만, 단명해서 안타까워했던 인물이고 자사는 공자의 손자이자 ‘중용’(中庸)을 정리하는 등 학문 공헌도 높은 인물이다.    증삼은 공자가 가르친 효(孝)와 교육에 많은 공헌을 한 제자고, 맹자는 공자의 학문을 이어받아 더욱 뛰어난 철학 기반을 다진 인물이어서 4명의 뛰어난 제자로 일컫는다.    따청뎬의 전면에 서 있는 10개의 석조기둥은 예술미가 빼어난 걸작들이다. 각각 두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그렸다.    따청뎬 뒤에는 친뎬(寢殿)과 셩지뎬(聖迹殿)이 있다. 친뎬은 공자의 부인인 올관씨(兀官氏)를 모신 건물로 북송 때 지은 것을 청나라 때 개축하였다.    셩지뎬은 1592년 건설한 대전으로, 공자의 일생에 관한 고사를 그린 총 120폭의 돌조각인 성적도(聖迹圖)가 보존되어 있다.    공푸(孔府 공부)는 예전에 연성공푸(衍聖公府)라고 불렸다. 취푸 시내 있는 공먀오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공푸는 역대 공자의 자손이 살던 저택 겸 관공서로 사용되었다.    송나라 인종(仁宗) 시대(1038년)에 건축되었다. 공푸의 내부 구조는 동·서·중 세 부분으로 나뉜다. 동쪽은 가묘의 소재지이며 빠오번탕(報本堂)과 타오먀오(桃廟)는 모두 동쪽에 위치한다.    서쪽은 연성공이 책을 읽고 시문과 예의를 배우고 시를 짓고 객을 초대했던 곳이었다. 서쪽에 중수탕(忠恕堂), 안후애탕(安懷堂) 등 있다. 또 남북의 꽃 정원은 보통 객을 대접했던 곳이었다.    중부는 공푸의 중심이다. 뒤에 있는 주택은 최후의 공푸 화원이다. 공푸는 중국 봉건 사회의 전형적인 내택합일의 귀족 장원이다.   공린(孔林 공림)은 성린(聖林)이라고 불렸다. 취푸 시내 북쪽에서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공먀오에서 마차를 타고 가면 된다. 공린은 공자와 그 후손의 묘소이다.    공자의 묘지는 공린의 중앙에 있고, 동쪽에는 공자의 아들 공리, 남쪽에는 손자 공의 묘가 있다.    처음 공린의 규모는 3000평이었으나 이후 역대 황제들이 계속 제사를 지내고 묘소를 짓는 등의 제례 행사를 이유로 공자의 후손들에게 토지를 주어서 면적이 차츰 확대되어 청나라 때는 9만 평에 이르게 되었다.    주위의 담의 길이가 7km이다. 공린 안에는 높고 오래된 나무 2만 여 그루가 있어 사계절 내내 시들지 않는다. 안을 돌아다니기 위해서는 입구에서 자전거를 빌리는 것이 좋다.    샤오소호링(少昊陵 소호릉)은 취푸 동쪽에서 4km 거리에 있는 옛날 행정 구역의 동북쪽에 위치한다.    면적은 3750평이며 능(陵)의 표면은 대리석 석판으로 만들어져 일명 ‘완스산(萬石山)’이라고 칭하며, ‘동방의 피라미드’라는 호칭도 있다.    또한 <수호지>의 주무대인 ‘양산박(梁山水泊)’의 유적지, 허저(荷澤)의 목단, 로성(聊城)의 ‘광위에로(光岳樓)’, 더저우(德州)의 ‘수루왕링(蘇祿王陵)’, ‘저오좡(棗莊)’의 1만 그루의 석류, ‘후이산후(徽山湖)’의 10만 그루의 연꽃이 있으며 고대 운하 등이 있다.   멍먀오(孟廟 맹묘)는 맹자의 고향이자 사당이 있는 조우셴(鄒縣)은 취푸에서 20km 정도 떨어진 도시다.    멍먀오(맹자를 모신 사당), 멍푸(맹자의 자손들이 살던 곳)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다. 공자가 위대한 업적으로 유가를 세웠다면 맹자는 그 사상의 철학 완성도를 높인 인물이다.    맹자 고향 여행의 중심은 멍먀오다. 멍 먀오는 북송(1037년)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원 위치는 맹자 묘(墓)의 근처였는데 북송 선화(宣和) 3년(1121년)에 현재의 위치에 사당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명나라 때 현재 규모로 확장됐다. 맹모는 장방형으로 주전은 야셩뎬(亞聖殿)이다.    높이 17m, 면적 560m2로 녹색 유리기와 건물이다. 건물 안에는 맹자의 상이 모셔져 있고, 뒤에는 청나라 옹정제가 쓴 ‘수선대후(守先待後)’라는 편액이 있다.    또 이 건물 뒤에는 멍무뎬(孟母殿) 등이 있는데 멍무뎬에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에 관한 고사 등 맹자 어머니에 관한 기록도 있다.     글/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 오피니언
    2020-06-04
  • 샤오싱(紹興)-기개와 기풍이 깃든 중국 지성의 산
    샤오싱은 동방의 베니스로 불리는 중국의 몇 지역 가운데서도 가장 빼어난 곳이다. 바로 긴 인문유산과 더불어 지금도 교육의 중심도시로 고아한 기풍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샤오싱은 항저우만 치엔탄강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물길이 도시를 가로질러 가로세로로 펼쳐져 도시로 작은 배가 지나다닌다.    이곳의 역사를 설명해주는 한 인물이 있는데 바로 그가 우왕(禹王)이다. 창지앙이든 황허든 홍수가 있는 곳에는 그에 관한 전설이 꼭 있는데, 그 가운데 절정이 바로 샤오싱이다.    샤오싱에 위치한 우왕(禹王) 묘비   바로 그가 수신 공공과 싸운 회계산이 있는 곳이자, 그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의 무덤은 이곳이 4000년 전 하(夏)나라 때 적지 않은 역할을 한 도시라는 것을 증명한다.   무엇보다 이곳은 중국 근대 지성의 상징인 루쉰(魯迅)의 고향이라는 점이 매력적이다. 루쉰뿐만 아니다. 중국의 영원한 총리 저우언라이, 여성 혁명가 추진, 베이징대학 총장이자 중국 현대 교육의 상징인 차이위앤페이 등 샤오싱은 상상 이상으로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또 샤오싱은 중국 8대 명주에 들어가는 샤오싱주(紹興酒)의 고향이다. 샤오싱은 상하이에서 기차로 2시간 반 정도면 갈 수 있고, 항저우에서는 기차나 버스로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에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곳이다.    루쉰지니엔관(魯迅紀念館)은 중국 근현대 인물 가운데 가장 중국인에게 사랑받는 인물인 루쉰의 옛집을 보전한 것이다.    루쉰지니엔관(魯迅紀念館)   중국인에게 근현대 인물 가운데 꼽으라면 보통은 루쉰과 저우언라이(周恩來)를 꼽는다. 쑨원(孫文)이 건국의 아버지로 숭앙받는다면 루쉰은 당대의 인물로 중국인들의 정신에 깊이 각인된 인물이다.    그리고 마오쩌둥이 정치 1인자로 군림했다면 저우언라이는 2인자로 중국인들의 복리와 안전을 위해 몸을 바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사실상 샤오싱 사람이라면 사람들은 더 놀랄 것이다. 루쉰은 저지앙성 샤오싱에서 출생했다. 조부의 하옥(下獄), 아버지의 병사(病死)로 고통을 겪었으며, 1898년 난징의 강남수사학당(江南水師學堂)에 입학한 후 당시의 계몽적 신학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04년 센다이의학전문학교(仙臺醫學專門學校)에 입학했으나, 일본인들의 중국인에 대한 부당한 처우 등을 보고, 그는 중국인들의 몸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에 귀국해서 학문 연구는 물론 글쓰기와 교육 운동으로 국민 계몽에 나섰다.    전근대를 가르켜 ‘식인(食人)의 역사’라고 칭한 『광인일기』(狂人日記)를 비롯해 『아큐정전』(阿Q正傳) 등을 남겼으며, 지하 운동과 교육 운동을 통해 중국 현대 정신이 태동하는 데 큰 몫을 했다.    루쉰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관으로 루쉰의 육필 원고와 편지 등 600여 점의 자료가 있다. 기념관 옆 생가에는 루쉰이 성장한 흔적들을 볼 수 있다.    생가에는 이곳에서 자생하는 식물을 볼 수 있는 백초원과 샤오싱 민간생활을 볼 수 있는 민속박물관의 기능을 같이 하고 있다. 또 집 맞은편에는 루쉰이 공부하던 싼웨이슈위(三味書屋)도 있다.    루쉰 고가 옆에 있는 셴헝지우디엔(咸亨酒店 함형주점)은 루쉰의 소설에 등장해서 특히 유명해진 음식점이다. 루쉰루 44호에 있는데, 이름은 주역에서 따왔는데, 모든 것이 길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시내에는 저우언라이주쥐(周恩來祖居)도 있다. 이곳은 저우언라이의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왔던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할아버지가 지앙쑤에서 일해 이사를 했으나 1939년 이곳에 내려와서 친구들과 각계 인사를 만나는 등 항일구국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저우언라이 동상   저우언라이 역시 할아버지 때부터 임지가 옮겨다녀 지앙쑤 등을 다녔지만 집안의 고택은 샤오싱에 있고, 그 역시 이곳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미인과 명필을 만나기 위해서는 시챰만(西施故里 서시고리)와 란팅(蘭亭)을 다녀와야 한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대표격인 미녀 서시의 고향이다.    후완샤지앙(浣紗江)가에 있는데 안에는 서시의 조각상이 서 있다. 주위에는 왕희지가 쓴 ‘완사浣紗’의 진본 흔적도 볼 있다. 란팅은 서시의 옛집으로 가는 길에 있다. 왕희지가 당대 인물들과 모여서 글을 쓴 곳이다. 지금은 다양하게 정비되어 꼭 들러볼 만한 곳이다.    둥후(東湖 동호)는 샤오싱 중심에서 약 5km 떨어져 있다. 진시황이 순례할 때 들르기도 했던 곳이다. 호수와 더불어 기암과 다양한 볼거리들이 있다.  글/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 오피니언
    2020-05-29
  • 항저우(抗州)-호수에 넘치는 돈과 여행객
    2월이나 11월에 중국 어디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항저우를 꼽을 것이다. 물론 든든한 주머니가 있으면 더 좋겠지만, 뚜벅이 여행이라고 해도 항저우는 그다지 힘들지 않다.    낮에는 자전거로 도시 곳곳을 둘러본다. 밤이면 호숫가 찻집에서 여유를 즐기거나 호숫가를 걸으면서 ‘백사전’ 같은 전설이나 소동파나 백거이를 회상하며 낭만에 빠질 수 있다.    항저우 서호 호숫가에 있는 소동파 동상   물론 두사람에 관한 지식은 반시간 이야기하기도 힘들테니 그들의 시집 한권쯤은 준비해서 즐겨야 할 것이다.    또 항저우 역사의 수많은 이야기를 담은 ‘송성’이나 시후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극으로 만든 ‘인상서호’ 등을 보면 이 도시가 얼마나 풍부한 이야기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필자는 아쉽게 대부분 여행을 인솔하면서 이곳에 갔지만 그래도 이 도시가 가진 어떤 매력에 계속해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항저우 시는 저지앙 성의 성도다. 중국 7대 전통 도시 중의 하나로 진시황이 도시로 발전시킨 이후 지금까지 22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남송시대에는 수도의 역할도 했다.    영하로 내려가는 날도 적지만 겨울은 의외로 쌀쌀하다. 또 여름은 습도도 높아 찜통을 방불케 함으로 피하는 게 상책이다. 비단을 소재로 한 직조 기술과 롱징차 등 중국 차의 중요한 고향 가운데 하나다.    항저우는 비교적 공항도 잘 발달해 있다. 샤오산(蕭山)국제공항은 시에서 30km쯤 떨어져 있다. 항저우는 베이징과 항저우 간 운하의 종점이다.    과거 이민족이 주로 지배하던 북방의 수도와 한족이 융성하던 강남의 물자 이동은 무엇보다 중요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육로교통이 활발하지 못했던 당시 운하는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 중심이 베이징과 항저우를 잇는 운하다. 이제 그 운하는 상당히 기능을 잃었지만 몇 가지 기능을 하고 있는데, 항저우와 쑤저우(蘇州) 및 우시(無錫)를 잇는 운하다.  항저우 여행의 중심은 시후10경(西湖10景)이다. 시후는 크게 쑤티(蘇堤) 방파제를 큰 기점으로 5개의 호수로 나누어진다.    시후의 아침 풍경   호수는 지앙난(江南) 특유의 모습으로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백낙천이나 소동파는 물론이고, 한자성어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주인공인 월왕 구천과 오왕 부차, 중국 4대 미인의 하나인 서시(西施)의 추억이 있는 곳이다.    항저우 시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시후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다른 면은 도시와 접한 항저우의 중심이다. 시후의 규모는 남북 길이 3.3km, 동서 길이 2.8km로, 자연과 인공이 결합된 정원 문화의 걸작이다. 서호의 신-구 십경(10景)을 비롯해 갖가지 특색 있는 볼거리들이 있다.   시후 10경으로 부족해 신시후10경(新西湖10景)을 만들어냈다. 윈시주징(云栖竹徑)은 시후 서남 쳰탕지앙(錢塘江) 북쪽 우윈산(五云山) 윈시우(云栖塢)에 있다.    우윈산의 오색구름이 경사진 곳으로 모여서 운하를 이루는 모습을 말한다. 위황페이윈(玉皇飛云)는 시후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해발 237m 위황산(玉皇山)은 명나라 때 옥황황제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해서 이 이름을 얻었다. 산꼭대기에 올라서면 구름이 아름다워 이런 신10경으로 꼽힌다.    시후 동남에 있는 우산톈펑(吳山天風)은 산에 부는 바람이 아늑해서 명소로 꼽힌다. 완롱구이위는 호수 서남쪽에 있는데 장마철에 비 내리는 모습이 낭만적이어서 명소로 꼽힌다.    레이펑시자오(雷峰夕照)는 ‘백사전’의 공간이기도 한 뢰이펑타에 석양이 서서히 비칠 때 탑의 그림자가 공중을 가로지르고 정자에는 금빛이 비쳐서 이름을 얻었다.    뢰이펑타에 설치된 백사전의 전설을 묘사한 조형물     지우시얜쑤(九溪烟樹)는 호수 서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1986년 여행지로 개발되어 인공 폭포도 만들어져 있다. 골짜기에 자욱한 안개가 인상적인데, 그 속에 나무들이 있어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    황룽투추이(黃龍吐翠)은 호수 북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데, 옆에는 역시 신10경인 황롱동(黃龍洞)이 있다. 이곳은 어느 날 갑자기 황룡이 날아와서 땅이 흔들리고 돌이 갈라졌는데, 이곳이 용의 입 같고 맑은 샘물이 솟아 나와서 그런 이름을 가졌다.    바오스류우샤(寶石流霞)는 호수 북면 바오스산 위에 자리잡고 있다. 산에 기이한 돌이 많다. 해가 비치면 색깔이 꼭 비취 같아서 바오스산이라 한다. 특히 아침해가 떠오를 때 혹은 해가 질 무렵에 바오스타(保叔塔)와 자주색 바위는 광채를 품을 정도로 아름답다.    10경에 신10경까지 일일이 돌아볼 필요도 여유도 없겠지만 그곳을 지날 때 이름이라도 알면 새로운 느낌이 들 것이다.     창살 너머로 보이는 시후 풍경   링인스(靈隱寺 영은사)는 항저우의 대표 사찰이다. 시후 서쪽 베이까오펑(北高峰)과 페이라이펑(飛來峰)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다.    동진(東晉)시대에 건립된 후, 명나라 초기에 다시 건축하여 링인스(靈隱寺)라고 이름을 고쳤다. 청나라 강희제가 절 앞에 ‘운림사(云林寺)’란 글을 남겼다.    절 앞 두 개의 돌에 불교 경문이 새겨져 있다. 절 안의 건물로는 톈왕뎬(天王殿), 따슝바오뎬(大雄寶殿), 야오스뎬(藥師殿), 둥시우뎬(東西딕殿), 따베이스(大悲寺), 롄떵거(聯燈閣)와 스님들의 방이 있다.    그중에서 대웅보전, 즉 따슝바오뎬은 거대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인데, 높이 33,6m에 단층 겹친 지붕으로 유명한 고대 건축물 중의 중 하나다.    석가모니 불상은 높이 24.8m, 24쪽의 향나무로 조각하여 만들고 온몸에 금도금을 했다. 여행游1, 2, 4번과 일반버스 7, 807번 등이 간다.    웨먀오(岳廟 악묘)는 중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중 하나다. 시후 북서쪽 물가에 있는, 중국사에 있어 충신의 대명사라 불리는 악비(岳飛, 1103∼1142)의 묘다.    악비는 여진족에 대항해 남송을 지키려다 전사했다. 대전 안에 높이 4.5m의 악비 좌상이 있고, 대전 밖의 정원에는 악비 부자의 묘가 있다. 최근에는 악비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도 적지 않게 들린다. 주로 그가 진짜 충신은 아니라는 쪽이다.      글/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 오피니언
    2020-05-22
  • 쓰촨 -사람들 사이에 4개의 강이 있다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만나는 중국의 느낌은 계절을 떠나서 황량하다는 것이다. 설혹 식물이 무성한 여름이라고 해도 중국 전역은 너무 황량하다.   두지앙얜위쭈이    하지만 중국의 여러 지방 가운데 쓰촨의 공중 풍경은 나에게 그런 느낌이 아니라 아주 신비한 느낌으로 와 닿았다. 상당수의 날들은 밑을 볼 수 없다. 하지만 간간이 그런 안개 위로 하얀 설산이라는 모자를 쓴 푸른 빛의 산들이 적지 않다.   구름 속에 떠 있는 이런 산들을 보노라면 문득 그 자리에서 내리고 싶은 욕망이 솟아나곤 한다. 신선들이 살 것 같은 그런 곳이 쓰촨이다. 실제로도 쓰촨은 여행자들에게 천국과 같은 곳이다. 우선 날씨가 좋고, 음식이 좋고, 온갖 경치가 풍성하기 때문이다. 중국 4대 요리에 포함되는 쓰촨은 풍부한 물자를 바탕으로 음식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특히 대부분의 음식에는 매운 고추가 들어가고 향차이(香菜)라는 강한 향의 원료를 쓰지 않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 가운데 하나다.   쓰촨음식의 진수를 맛보고 싶다면 탄스관푸차이(潭氏官府菜)에 가보는 게 좋다. 이미 전국에 체인망이 있어서 타 지역에서도 이 음식점의 맛을 볼 수 있지만 원조집이 바로 이곳이다.   배낭여행자들이 많이 묵는 지아통빈관에서 강을 따라 민산판디엔방향으로 400m쯤 오다가 만나는 인항추안추이지우루(銀杏川菜酒樓)도 정통 쓰촨요리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사천요리에는 매운 고추가 들어가고 향차이(香菜)라는 강한 향의 원료를 쓰지 않는다   그밖에도 쓰촨요리로 널리 알려진 마파두부의 원조집이나 쓰촨요리의 대표주자 중 하나인 훠궈(火鍋)는 황청라오마를 비롯해 많은 곳이 유명한데 어디를 가도 나름대로 실망하지 않는다. 단, 너무 매우므로 다음날 아침에 화장실에 가서 고생을 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날씨가 좋다는 것은 상대적이다. 청두의 겨울은 해를 보기가 힘들 만큼 안개로 덮여 있다.   다행히 기온은 낮지 않기 때문에 여행이 힘들지는 않다. 오죽했으면 '청두 개는 해를 보면 짓는다'는 말이 있을까. 하지만 안개 속 같은 풍경을 여행해도 이곳 여행이 풍성한 것은 경치를 넘어서는 풍성한 맛과 인문 자원이 있기 때문이다.  겨울을 제외한 다른 계절은 각기 다른 꽃들이 피어나고 갖가지 풍성한 축제와 문화를 갖고 있다. 예로부터 중국에서도 가장 살기 좋은 고장 중에 하나여서 청두는 천부(天府 하늘마을)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쓰촨(四川)은 무척이나 선명한 뜻을 가진 지명처럼 ‘네 개의 내(川)’를 가진 도시다. 서쪽에서 진사지앙, 야롱지앙, 따두허, 민지앙의 거대한 물 줄기가 이 땅을 흐르고 있다. 모두 만년설산에서 발원한 물 줄기로 창지앙의 가장 중요한 상류 하천이다.   중국 현대사에 익숙한 이들이 강 이름을 들으면 금방 대장정(大長征)을 생각해 낼 것이다. 진사지앙이나 따두허는 장정군이 꼭 건너지 않으면 안 될 가장 중요한 이동상의 장애물이었는데, 이 강을 건넘으로써 시베이(西北) 평원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장정의 두 지도자인 주더(朱德)와 덩샤오핑(鄧小平)은 쓰촨이 고향이기에 마음이 더 애잔했을 것이다. 이 네 개의 강을 건너면서 중국 현대사는 시작됐다.   이 강으로 가는 여행 코스는 그다지 잘 개발된 것은 아니다. 앞으로 소개할 여행지는 대부분 민지앙을 따라가는 여행 코스다. 서쪽을 지나는 따두허의 옆에는 공가산이라는 설산의 대표 주자가 있다. 쓰촨의 지도를 보면 중국 전도의 축소판처럼 생긴 것에 놀란다. 하지만 더 놀랄 것은 쓰촨이 가진 무한한 여행 자원이다. 필자도 쓰촨을 몇 차례 여행했지만 이 성에서 본 것은 극히 미미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사실 쓰촨은 한달을 투자해도 전혀 아깝지 않은 여행지다.    마치 외계의 유적 같은 5000~3000년 전 유적으로 외계인 같은 형상을 한 모습이 인상적인 싼싱투이(三星堆)를 비롯해 진시황과 비슷한 시대에 만들어진 인류 최고의 수리 시설 가운데 하나인 두지앙위앤(都江堰), 삼국지에서 가장 사랑받는 왕조인 촉나라의 정치 중심인 청두 등 수많은 곳이 역사 자원이 풍부하다.   거기에 도교의 성지인 칭청산(靑城山), 불교의 성지인 어메이산(峨眉山) 등 정신문명의 보고이기도 하다. 거기에 쓰꾸냥산, 공가산으로 이어지는 만년설산 지역은 장족 불교 등이 녹아 있어서 또 다른 샹그릴라로 추앙받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2008년 봄 쓰촨은 대지진이라는 재앙을 맞았다. 거기에 언제 다시 지진이 다시 올지 모른다. 중국 역사상 최악의 지진인 탕산대지진처럼 수십년은 지나야 지진의 상처를 극복하고, 위협감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쓰촨은 이대로 간과하기에 너무 빼어난 여행지들이 많다.   글 =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 오피니언
    2020-05-19
  • 쑤저우(蘇州)-역사만큼이나 빛난 물의 도시와 정원
    25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쑤저우는 강남 정원 문화의 중심도시다. 도시가 처음 생긴 것은 기원전 514년이다. 오왕 부차의 아버지 합려(闔閭)와 복수심에 불탄 오자서(伍子胥)가 세운 도시다.    시 전체가 와이청허(外城河)라는 운하에 싸여 있고, 이곳 사람들의 생활은 운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물의 도시’라 할 수 있다.    다른 도시들에 ‘동방의 베니스’라는 말이 많이 붙어 있지만 쑤저우가 그 첫 자리에 든다는 것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주워정위안(拙政園)   쌀, 명주, 차, 물고기 등이 풍부하게 생산되어 어미지향(魚米之鄕)이라 불리기도 한다. 쑤저우에는 시내 곳곳에 아름다운 정원들이 있는데, 그 중 주워정위안(拙政園)과 류위안(留園)은 중국 4대 명원(名園) 중의 하나이다.    최근에는 하이테크 단지를 대대적으로 조성해 중국 도시 가운데 가장 체계 있게 도시개발을 이끈 지역으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 삼성전자도 대규모 공단을 이곳에 조성했다.    쑤저우의 상징적인 여행지는 주워정위안(拙政園 졸정원)이다. 이곳은 쑤저우시 동북거리 178호에 위치하고, 면적 5만 2000㎡의 거대한 원림이다. 이곳은 동원(東園), 중원(中東園), 서원(西園) 그리고 주거 건물로 나뉜다.    주거 건물은 현재 위안린(園林)박물관 전시 홀로 이용되고 있다. 동부는 밝고 명쾌하게 트여 있고, 평평한 산등성이와 먼 산, 소나무 숲과 초원, 대나무 마을과 굽이져 흐르는 물을 주로 하고 있다.    주요 경치로는 란쉐탕(蘭雪堂), 주이윈펑(綴云峰), 푸롱씨, 톈추안팅(天泉亭), 수샹관 등이 있다. 중국 정원 문화의 진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 류위안의 맛은 꽃이 만발한 봄이나 시원한 기운이 도는 가을에 천천히 돌면서 여유를 갖고 봐야만 그 맛이 느껴진다. 여름에는 연꽃이 피고, 정원수들이 울창해 멋은 있지만 너무 습해서 여행자를 힘들게 한다.    류위안(留園 류원)은 중국 4대 명원(名園) 중의 하나로, 명나라 만력(萬曆) 20년(서기 1593년)에 처음으로 건설되었다.    류위안(留園 류원)   봉건시대 관료 타이푸스(太僕寺) 샤오칭(少卿) 서태시(徐泰時)의 개인 화원이었으며, 동원(東園)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리고 류위안과 이웃하고 있는 지에추왕뤼스(戒幢律寺)를 서원(西園)이라 칭한다.    후치우(虎丘 호구)는 쑤저우에서 북서쪽으로 5km 떨어진 언덕으로, 춘추시대 오나라 왕 부차(夫差)가 그의 아버지 합려(闔閭)의 묘역으로 조성한 곳이다.    이곳은 오랜 역사, 다채로운 문화, 아름다운 풍경이 조화를 이뤄 ‘삼절(三絶)’이라 불리고, 이곳의 가장 유명한 경치는 ‘지우이’(九宜)라 불리고 있다.    1000여 년 동안 현지의 가장 아름다운 경치로 쑤저우(蘇州)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들르는 곳이다. 시인 소동파는 쑤저우에 와서 후치우를 보지 않으면 유감스러운 일이다고 말했다.    이곳은 수많은 고사성어들이 생긴 곳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단어가 생긴 ‘감천’, 오왕 합려가 칼을 시험했다는 ‘시검석(詩劍石)’,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지 모른다는 말이 나온 ‘천인석(千人石)’ 등을 비롯해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다.   한산스(寒山寺 한산사)는 육조시대에 세워진 고찰로, 시(詩) 한 수로 세상에 유명해진 절이다. 당나라 시인 장계(張繼)가 ‘풍교야박(楓橋夜泊)’이란 시를 써 이곳의 정경을 묘사했다.    한산스(寒山寺 한산사) 종탑   (달은 지고 까마귀는 우는데 천지 가득 서리가 내리네/ 풍교에는 고깃배 등불 마주하여 시름 속에 졸고/ 고소성 바깥 한산사에/ 한밤중 종소리 울릴 제 객선이 닿았네 月落烏啼霜滿天 江楓漁火對愁眠 姑蘇城外寒山寺 夜半鐘聲到客船)   펑치아오(楓橋 풍교)는 한산스와 더불어 당대의 시인 장계의 시로 유명해진 곳이다. 천년 동안 이 시 하나가 이 다리의 정서를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풍교는 단공석홍교(單孔石拱橋)로 대운하가 이곳을 통과했다. 한산스와 마주보고 있다.     스즈린(獅子林 사자림) 역시 유명한 정원 중 하나다. 쑤저우성 동북 레이먼(類門) 내의 위안린루(園林路)에 위치하고, 원대(元代) 원림을 대표한다.    스즈린은 원래 보리 정종스(正宗寺) 뒤편의 화원으로, 이곳은 타이후 돌무리를 깎아 만든 정교한 인공산으로 유명한데, 많은 석봉(石蜂)들의 형상이 사자(獅子)를 닮았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지어졌다.    인공산은 상하 내외로 굽이져 선회하며, 동굴과 계곡에 들어서면 마치 미궁에 들어선 듯하여 한 치 앞도 분간할 수가 없고, 반드시 쉰산루(循山路)를 통해야만 동굴에서 나올 수 있다.    마치 미궁과 같은 동굴은 바로 불법의 힘에 비할 수 없음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위안린루 23호에 위치하며 28, 3번 버스가 간다.     왕스위엔(網師園 망사원)은 총면적이 약 240평에 달하는 크기로 쑤저우 시에 있는 정원 중 가장 작은 규모이나 볼거리가 많다.    배치가 빈틈없고, 경중이 분명하고 변화가 풍부하며, 공원 내에 공원이 있고, 풍경 외에 풍경이 있어 매우 정교하고 깊숙하고 고요하다.    비록 건축물이 많으나 비좁은 듯한 느낌이 없고, 연못이 작으나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아, 쑤저우의 고전 조경 풍치림 중 매우 독특한 특색을 지닌 본보기로 여겨지고 있다. 밤에는 강남의 전통 공연을 펼치는 공연을 한다.    이위안(怡園 이원)은 구성(舊城) 중심의 런민루(人民路) 중단에 위치하고 있다. 이위안은 청나라 때 만들어진 개인 정원으로, 쑤저우 조경 풍치림 중 가장 늦게 형성되었기 때문에 다른 풍치림의 여러 가지 좋은 점을 갖추고 있으며, 배치가 빈틈없고 수법이 적절하여 비교적 높은 감상 가치를 지닌 곳이다.    글/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 오피니언
    2020-05-15
  • 강남수향(江南水鄕)-고색 창연한 동양의 베니스
    사람들에게 강남 수향을 인상 깊게 만든 것은 톰 크루즈가 나온 영화 <미션 임파서블 3>다. 이 영화에서 그림 같은 마을과 강들이 펼쳐지는데 이곳이 바로 강남 수향 가운데 하나인 시탕이다.    시탕   영화 <색계>에도 이런 수향의 풍모가 잠시 나오는데, 이곳은 상하이 인근 마을이다.    상하이, 저지앙, 지앙쑤 지역은 산이 많지 않고, 평지에 가까워서 대부분의 도시들로 물길이 나 있다. 또 작은 호수들을 통해 진주를 생산하고, 고기와 새우 등 먹을거리를 얻었다.    동양의 베니스라는 이런 마을들은 수십 곳이 있지만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곳은 조우주왕이나 통리 등 지앙쑤 성 지역과 우전, 시탕 등 저지앙 지역에 많다. 이곳 여행을 떠나보자.    조우주왕(周莊)은 강남의 수향 가운데 가장 먼저 개발된 곳이다. 그만큼 여행 자원이 잘 정비된 반면에 개발로 인한 인위적인 색채가 강한 곳이다.    조우주왕(周莊)   중국에는 '중국 산천의 아름다움은 황산(黃山)에 집결해 있고, 중국 수향(水鄕)의 아름다움은 조우주왕에 집중되어 있다'는 말이 있다. 2001년 아펙회의 때는 참가단이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우지앙(吳江)시와 상하이시의 칭푸(靑浦)현 경계에 있으며, 상하이의 뎬산후(澱山湖) 지역에서 6km 떨어져 있고, 쑤저우시에서 60km 정도 떨어져 있다.    조우주왕은 그 개발 역사가 긴 만큼 잘 정비된 곳이다. 도시를 흐르는 물과 고색 창연한 집, 다리 등이 어울린다. 내부에서 유명한 곳은 첸푸지앙스(全福講寺)나 쑤앙치아오(雙橋) 등이 있다. 첸푸지앙스는 송대에 만들어진 절로 건축미가 빼어난 사찰이다.    쑤앙치아오는 스더(世德)와 잉안(永安) 두 다리를 말한다. 명대에 만들어진 다리인데 서로 연결되어 있다. 모양은 고대의 열쇠를 닮았다.    그밖에 난시지에(南市街)에 있는 거부 선완싼(沈万三)의 주택인 선팅(沈廳)은 청나라 건륭제때 만들어진 100여 칸의 저택으로 조우주왕 건축의 표본이다.    특히 조우주왕에는 수많은 술집과 식당이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곳은 션지우지아(沈酒家)이며 유명한 요리로는 완싼티(萬三蹄), 츈쓰리쿠와이(純絲鯉膾), 쉰칭도우(薰靑豆), 싼웨이위엔(三味圓), 칭수이따자시에(淸水大閘蟹) 등이 있다.    완싼티는 돼지족발, 특히 뒷다리를 이용한 요리이다. 먼저 센 불에 돼지족발을 삶은 뒤 다시 약한 불에 천천히 오랜 시간 동안 삶는다.    먹을 때는 자르지 말고 뼈를 살 속에서 꺼낸 다음 먹는다. 느끼하지 않아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도 맞다. 츈쓰리쿠와이는 잉어 요리로 대단히 맛이 좋으나 현재는 잉어가 매우 적어 평소엔 먹기가 어렵다.   통리(同里)의 옛 이름은 푸투(富土)다. 가장 먼저 개방한 수향 조우주왕에서 서쪽으로 10km쯤 떨어져 있고, 배들도 다닌다. 쑤저우에서는 40km 정도 떨어져 있다. 주변이 온통 물이다.    통리(同里)   아니나 다를까 동방의 작은 베니스라고 불린다. 내부는 다른 수향과 마찬가지로 잘 정비된 맛이 있지만 더욱 빼어난 점이라면 강가로 난 고풍스런 집들을 잘 정비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다듬어 놓았다는 것이다.    통리는 정문으로 들어가 나룻배로 마을을 돈 후 투이스위앤(退思園 퇴사원) 등 주택 등을 둘러보는 방식으로 여행한다.    투이스위앤은 통리의 건축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건물로 정자, 누락, 사당, 다리, 회랑, 연못 등이 가장 잘 배치된 건물이다.    내부는 그리 화려하지 않으면서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다. 〈홍루몽〉 등 적지 않은 드라마를 이곳에서 찍었다.     루즈(쾎直)는 통리, 조우주왕 인근에 있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수향이지만 색다른 멋을 가진 곳 가운데 하나다.    쑤저우에서 28km쯤 떨어져 있고, 2000년의 역사를 가진 마을이다. 당대 이후 형성됐는데 마을의 모습이 록(쾎)자를 닮았다 해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    루즈의 가장 큰 특징은 바오셩스(保聖寺)의 나한상과 상업거리가 유명하다. 또 이곳은 다섯 걸음에 다리 하나(五步一橋)라는 말이 있을 만큼 다리가 많은데, 41개의 옛 다리가 촘촘히 자리하고 있다.    시탕(西塘)은 조우주왕이나 통리에 비해 개발이 덜 된 천연의 수향(水鄕) 가운데 하나다. 희색 담장에 검은 기와, 도시를 가르는 작은 배들의 흔적, 연무가 낀 모습 등은 마치 한폭의 그림 같다고 느껴지는 곳이다.    송대에 건설된 망셴치아오(望仙橋)를 비롯해, 라이펑치아오(來鳳橋)나 우푸치아오(五福橋), 워롱치아오(臥龍橋) 등은 명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도시 전체를 기품 있게 하는 다리들이다.    또 중푸탕(種福堂), 준원탕(尊聞堂), 쉐자이(薛宅) 등은 강남 전통 건축의 전형을 볼 수 있는 집들이다.    시탕은 지아싱(嘉興)에서 33km쯤 떨어져 있다. 또 상하이에서 90km쯤 떨어져 있는데, 상하이에서 지아싱으로 향하는 중간에 있다. 가장 가까운 도시는 지아산(嘉善)으로 10km 정도 떨어져 있다. 상하이에서 토·일요일에 시탕행 전용 여행 버스가 있어 이용하기 편리하다.    우전(烏鎭 오진)은 중국 유명 작가 마오둔(茅盾)의 고향이다.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고, 청년기에도 이곳에 내려와 살았던 적도 있다. 강남 8대 수향에 들어가는데, 아직 개발이 덜 되어 있다.    우전(烏鎭 오진)   가장 큰 특징은 동서남북이 십자가 형태로 잘 정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안에는 오래된 민가와 명청시대의 건물, 바둑판식의 거리, 다리 등이 전형적인 강남 문화를 느낄 수 있게 한다.    글/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 오피니언
    2020-05-1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