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른 살은 달려도, 달려도, 희부연 안개의 벌판이었다. 갑자기 아기를 낳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러면 나무같이 착륙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흙에 깊게 뿌릴 내리고 푸릇푸릇 수액이 불끈 도는 그런 삶. ‘살림’을 차린다는 말이 좋았다. ‘누군가를 살림’이란 말로 들렸다. 마른 잎에 젖을 물리는 모성의 세계가 궁금했고, 그 위대한 사랑의 극점에 다다르고 싶었다. 내게도 결혼의 타이밍이 찾아온 것이다.
어디 걸리기나 해봐라, 칼을 갈고 있을 때 하필 지금의 남편 우대리가 걸려들었다. 하지만 우리 과거는 어느 것 하나 맞출 수 없는 퍼즐이었다. 내가 최루탄 가스를 마시며 수유리 뒷골목을 헤맬 때 우대리는 런닝에 삼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밤마다 ‘걸 사냥’을 즐겼으며, 내가 바흐의 칸타타를 들으며 백석의 시를 읊조릴 때 우대리는 강남의 유한클럽 ‘있는 자식’ 멤버들과 골프를 치러 다녔다.
처음 보는 별종쯤으로 여기다 사뭇 진지해진 건 ‘귀곡산장의 밤’이었다. 내가 귀곡산장에 놀러간 밤, 술에 취한 우대리는 내가 보고 싶다 울며불며 징징거렸고, 친구들이 ‘소원 한번 들어주자’며 택시 하는 친구를 일당으로 꼬드겨 밤새 공동묘지를 뒤지고 다닌 것이다. 그날 지척에 두고도 못 만났지만 우린 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관계가 급물살을 타게 된 건 회사 MT때였다. 모닝콜 담당 우대리가 새벽부터 동료들을 모두 깨우고는 정작 본인은 잠들어버려 오질 못한 것이다. 하산 길 설악산 입구에 기다릴 거라 믿었던 그의 신기루가 끝내 사라지자 나는 다리가 마치 솜뭉치처럼 무너지는 걸 느꼈다. 내가 그의 도끼질에 넘어갔구나, 깨달은 순간이었다.
마침내 결혼을 결심한 난 우대리에게 평생에 남을 프로포즈를 준비했다. 회사 주차장에서 잠복하고 기다리다 새벽 두 시 퇴근하는 우대리와 신림동 포장마차로 갔다. 소주 서너 잔 기울이던 나는 이 남자에게 뭔가 결정적인 '한방'을 먹여야겠다 생각했다. “우대리, 네가 죽을 때 내가 니 눈을 감겨줄게” 내가 꺼낸 프로포즈였다. 어린 사남매를 두고 차마 눈을 못 감고 돌아가신 엄마의 두 눈을 감겨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의 끝’이었다. 그날 밤 우린 농담 같은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격하게 감동 받은 우대리는 집에 안 들어간다고 떼를 썼다. 우린 집 앞 좁은 골목에 티코를 세우고 밤새 서로를 엉큼하게 더듬다 아침에 같이 출근했다.
세상에 ‘내 귀에 캔디’ 같은 달콤한 구애는 널렸다. 하지만 난 결혼에 이르는 사랑은 ‘의리’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의 후미지고 그늘진 길들을 휘휘 돌아, 맵고 쓰고 무미건조한 인생의 모든 굴곡을 구불구불 지나, 이제는 너덜너덜해진 사랑의 막다른 골목에서 그의 눈을 감겨주고 그의 쓸쓸한 부재까지 기꺼이 감당하며 내 몫으로 지고 걸어가는 사랑…. 그런 사랑을 줄 수 있는 생이라면 아름답지 않을까. (다음 편에 계속)
[김라라 / 식품기업 R사 마케팅팀 팀장]
어디 걸리기나 해봐라, 칼을 갈고 있을 때 하필 지금의 남편 우대리가 걸려들었다. 하지만 우리 과거는 어느 것 하나 맞출 수 없는 퍼즐이었다. 내가 최루탄 가스를 마시며 수유리 뒷골목을 헤맬 때 우대리는 런닝에 삼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밤마다 ‘걸 사냥’을 즐겼으며, 내가 바흐의 칸타타를 들으며 백석의 시를 읊조릴 때 우대리는 강남의 유한클럽 ‘있는 자식’ 멤버들과 골프를 치러 다녔다.
처음 보는 별종쯤으로 여기다 사뭇 진지해진 건 ‘귀곡산장의 밤’이었다. 내가 귀곡산장에 놀러간 밤, 술에 취한 우대리는 내가 보고 싶다 울며불며 징징거렸고, 친구들이 ‘소원 한번 들어주자’며 택시 하는 친구를 일당으로 꼬드겨 밤새 공동묘지를 뒤지고 다닌 것이다. 그날 지척에 두고도 못 만났지만 우린 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관계가 급물살을 타게 된 건 회사 MT때였다. 모닝콜 담당 우대리가 새벽부터 동료들을 모두 깨우고는 정작 본인은 잠들어버려 오질 못한 것이다. 하산 길 설악산 입구에 기다릴 거라 믿었던 그의 신기루가 끝내 사라지자 나는 다리가 마치 솜뭉치처럼 무너지는 걸 느꼈다. 내가 그의 도끼질에 넘어갔구나, 깨달은 순간이었다.
마침내 결혼을 결심한 난 우대리에게 평생에 남을 프로포즈를 준비했다. 회사 주차장에서 잠복하고 기다리다 새벽 두 시 퇴근하는 우대리와 신림동 포장마차로 갔다. 소주 서너 잔 기울이던 나는 이 남자에게 뭔가 결정적인 '한방'을 먹여야겠다 생각했다. “우대리, 네가 죽을 때 내가 니 눈을 감겨줄게” 내가 꺼낸 프로포즈였다. 어린 사남매를 두고 차마 눈을 못 감고 돌아가신 엄마의 두 눈을 감겨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의 끝’이었다. 그날 밤 우린 농담 같은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격하게 감동 받은 우대리는 집에 안 들어간다고 떼를 썼다. 우린 집 앞 좁은 골목에 티코를 세우고 밤새 서로를 엉큼하게 더듬다 아침에 같이 출근했다.
세상에 ‘내 귀에 캔디’ 같은 달콤한 구애는 널렸다. 하지만 난 결혼에 이르는 사랑은 ‘의리’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의 후미지고 그늘진 길들을 휘휘 돌아, 맵고 쓰고 무미건조한 인생의 모든 굴곡을 구불구불 지나, 이제는 너덜너덜해진 사랑의 막다른 골목에서 그의 눈을 감겨주고 그의 쓸쓸한 부재까지 기꺼이 감당하며 내 몫으로 지고 걸어가는 사랑…. 그런 사랑을 줄 수 있는 생이라면 아름답지 않을까. (다음 편에 계속)
[김라라 / 식품기업 R사 마케팅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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