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문단에 특별한 울림을 전하는 시집 한 권이 세상에 나왔다. '빗물 그 바아압'(걷는사람). 저자는 30년 넘게 서울역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권일혁 시인이다.

오랜 세월 거리에서 살아왔지만 그는 언어를 놓지 않았다.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써 내려간 시들은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세상과 마주하게 됐다.
이번 시집에는 1,500여 편 가운데 70여 편이 실렸다. 기성 시단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날것의 언어들이 생명의 바닥에서 원초적 시어로 꿈틀거리며 깨어난다. 단순한 고통의 기록을 넘어, 인간 존재가 지닌 슬픔과 희망을 동시에 드러내는 증언이기도 하다.

해설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가 맡았다. 그는 한국 현대문학과 사회적 약자를 꾸준히 주목해 온 문학인으로, '씨앗/통조림', '김수영을 위하여', '시로 읽는 3·1운동' 등 다수의 저서를 통해 문학과 사회를 잇는 작업을 이어왔다. 이번 해설을 쓰며 그는 “노벨문학상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 기쁜 순간이었다”고 감격을 전했다. 수십 권의 시집과 소설집 해설을 써왔지만, 이만큼 벅찬 경험은 드물었다는 것이다.
권일혁 시인은 긴 노숙의 삶 속에서도 꾸준히 시를 남겼다. 그의 네이버 카페에는 천 편이 넘는 작품이 남아 있다. 김응교 교수는 “고리키 문학을 연상시키는 밑바닥의 미학이 담겨 있다”며, 사회적 약자가 아닌 ‘시인’으로 권일혁을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출간은 2012년 ‘민들레 문학교실’에서 비롯된 인연 덕분에 가능했다. 당시 권일혁 시인을 만났던 박경장 교수의 권유와, 함께 교사로 활동했던 김성규 시인이 출판을 맡으며 결실로 이어졌다. 김응교 교수는 이를 두고 “사라졌던 인연이 다시 이어져 만들어낸 기적 같은 순간”이라고 회상했다.
'빗물 그 바아압'은 개인의 성취를 넘어 성프란시스대학의 ‘거리의 인문학 20년’이 낳은 결실이기도 하다. 성프란시스대학은 문학 강의와 교류를 통해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목소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세상에 전하는 길을 열어왔다. 이번 출간과 함께 대학은 텀블벅 펀딩을 진행 중이며, 인세는 요양원에 있는 권일혁 시인에게 전달될 예정이다.
화려한 수상의 영예가 아닌, 가장 낮은 자리에서 길어 올린 언어. '빗물 그 바아압'은 그 언어가 얼마나 깊은 울림을 전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김응교 교수의 말처럼, 이번 출간은 “노벨문학상보다 더 기쁜 순간”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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