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핫플레이스’로 불리며 전국에서 인파가 몰려들던 어느 거리를 찾았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줄을 서야 들어갈 수 있었던 맛집 자리는 텅 비어 있었고, 유리창에는 ‘임대 문의’라고 적힌 빛바랜 종이만 펄럭이고 있었다. 권리금이 수억 원을 호가하던 이 거리는 왜 불과 몇 년 만에 유령 도시처럼 변해버렸을까?
우리는 이 현상을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 부른다. 낙후된 구도심이 번성해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몰리면서,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과 둥지를 틀었던 영세 상인들이 내몰리는 현상이다.
지난 10년간 한국의 수많은 골목상권이 ‘뜨고 → 임대료 폭등 → 상인 이탈 → 상권 몰락’이라는 비극적인 사이클을 반복해 왔다.
현장 전문가로서 수많은 현장을 지켜보며 느낀 점은 하나다. 이것은 단순한 사회 문제가 아니라, 시장 참여자들의 ‘근시안적인 욕심’이 빚어낸 경제적 자살 행위라는 것이다.
임차인은 ‘월세 내는 기계’가 아니라 ‘콘텐츠 파트너’다. 많은 건물주가 착각하는 것이 있다. "내 건물이 위치가 좋아서 장사가 잘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오늘날의 소비자는 위치가 아니라 ‘콘텐츠’를 찾아 움직인다. 낡고 구석진 골목이라도 그곳에 실력 있는 셰프가 있고, 감각적인 바리스타가 있기에 찾아가는 것이다.
즉, 임차인(상인)은 단순히 공간을 빌려 쓰고 월세를 내는 ‘을(乙)’이 아니라, 죽어있던 건물의 가치를 올려주는 ‘콘텐츠 파트너’이자 ‘귀인(貴人)’이다.
그런데 상권이 조금 떴다고 임대료를 두 배, 세 배 올려버리는 것은, 매일 아침 황금알을 낳아주는 거위의 배를 갈라 당장의 고기를 꺼내 먹겠다는 어리석음과 같다.
거위가 죽으면(상인이 떠나면), 황금알(건물 가치 상승)도 영원히 사라진다. 텅 빈 상가에 붙은 ‘공실’ 딱지야말로 건물 가치를 갉아먹는 가장 무서운 바이러스임을 직시해야 한다.
‘나 혼자 산다’는 없다, ‘타운 매니지먼트’가 답
백화점이나 대형 복합쇼핑몰(스타필드 등)을 보라. 그들은 절대로 임대료를 무작정 올리지 않는다. 오히려 인기 있는 앵커 스토어(Key Tenant)를 모셔오기 위해 인테리어 비용을 지원하고, 수수료를 깎아준다.
왜? 그 가게가 있어야 손님이 오고, 그래야 건물 전체가 살기 때문이다.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바로 ‘MD(Merchandising) 기획’과 ‘통합 관리’다.
이제 골목상권과 원도심 도시재생에도 이러한 ‘타운 매니지먼트(Town Management)’ 개념이 도입되어야 한다. 개별 건물주가 각개전투하는 것이 아니라, 상인회와 건물주 협의체, 그리고 지자체가 하나의 팀이 되어야 한다.
"우리 거리는 1층에는 카페와 공방을 유치하고, 2층에는 식당을 넣자." "초기 2년은 임대료를 동결하고, 이후에는 매출에 따라 연동하자." 이처럼 상권 전체를 하나의 ‘지붕 없는 백화점’처럼 기획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이 2026년형 도시재생의 핵심이다.
법과 제도가 ‘착한 건물주’를 지켜줘야
물론 개인의 선의(Goodwill)에만 기댈 수는 없다. 정책의 역할이 여기서 필요하다. 정부와 지자체는 ‘상생협약’을 체결하고 임대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건물주에게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
재산세 감면, 리모델링 비용 지원, 용적률 완화 등 실질적인 당근을 제시하여, "착하게 구니 돈도 더 벌더라"는 경제적 유인을 만들어줘야 한다.
반대로,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지구를 지정하고, 과도한 임대료 인상을 제어하는 법적 안전장치(장기 계약 보장 강화 등)도 더욱 촘촘해져야 한다. 이는 사유재산 침해가 아니라, 상권이라는 ‘공공재’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교통신호다.
2026년, ‘공멸(共滅)’ 대신 ‘상생(相生)’을 선택하라
경기가 어렵다. 고금리에 건물주도 힘들고, 불경기에 상인도 힘들다. 이럴 때일수록 서로의 손을 놓으면 둘 다 죽는다. 각 건물에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상인들은 건물의 가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이다.
월세 10만 원을 더 받으려다 10개월 공실을 만드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상인들은 건물주를 적으로만 보지 말고, 내 가게의 가치를 높여 건물을 빛내주는 파트너로 설득해야 한다.
도시재생의 마침표는 하드웨어가 아니다. 그 공간을 채우는 사람들 간의 ‘신뢰’다. 2026년은 서로가 서로의 거위가 되어주는, 진정한 의미의 ‘상생 도시’가 되기를 희망한다.
황금알은 거위가 살아있을 때만 나온다는 사실, 이 단순한 진리가 우리 골목을 살리는 유일한 해법이다.
약력
- 공공정책 연구 경력 21년, 정책분석평가사 1급, 소상공인지도사 1급
- 한국동행서비스협회 부회장
- 前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조사연구부 연구위원
- 前 건국대, 남서울대, 한세대, 한서대, 백석대 등 외래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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