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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의 문화 ZIP] 프레타카리아토, 새로운 계급의 출현

  • 박상현 기자
  • 입력 2025.12.26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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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이브에 마주한 한 거대 플랫폼 기업의 민낯은 차라리 공포에 가까웠습니다.


최근 폭로된 쿠팡의 현장 관리 매뉴얼, 즉 노동자를 통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욕설을 섞고 고성을 지르며 위압감을 조성하라는 지침은 우리 사회가 도달한 인권의 하한선이 어디까지 추락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업 운영의 실책이 아니고, 효율성이라는 절대적 가치를 위해 인간의 존엄을 정교하게 거세하는 판옵티콘의 재현, '디지털 수용소'의 실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편리하게 이용하는 로켓 배송의 이면에는, 노동자를 인격체가 아닌 언제든 갈아 끼울 수 있는 저렴한 부품으로 취급하는 비인격적인 시스템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필연적으로 현대 사회의 새로운 계급, '프레카리아토(Precariato)'의 탄생이라는 서글픈 자화상을 투영합니다.


프레카리아토(Precariato)는 '불안정한'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프레카리오(Precario)와 노동 계급을 뜻하는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를 합성한 신조어입니다.


영국 런던 대학교의 가이 스탠딩(Guy Standing) 교수가 그의 저서 [프레카리아토: 새로운 위험한 계급]에서 체계화하며 알려진 개념입니다.


저숙련·불안정 노동에 종사하며 고용의 안전망 밖으로 밀려난 이들은, 이제 전 세계 청년 세대의 보편적인 운명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죠.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는 노동의 유연성이라는 화려한 수사로 포장되었지만, 그 실체는 자본이 자본을 잠식하며 부를 극단적으로 편중시키는 과정에서 중산층의 사다리를 걷어찬 것에 불과합니다.


팬데믹과 반복되는 경제 위기는 계층 간의 격차를 더욱 키웠습니다.


경제 위기를 맞은 정부는 무제한 돈을 풀며 경제를 부양하는데, 그 돈은 우선적으로 기업들과 담보물의 체질이 좋은 부자들에게 저리로 제공이 됩니다.


부자들은 이 돈을 빌려서 급매물로 나온 기업들과 땅, 건물, 아파트 들을 쓸어 담습니다.


그러고 난 후에 자산의 가격이 오르고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때 사회의 중심을 이루던 중산층은 직장을 잃은 이후 끝내 제자리를 되찾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그 여파가 개인의 삶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의 아이들 역시 강남 8학군이나 명문대 진학의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사회에 첫발을 내딛습니다.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생산의 주역이 되겠다는 꿈 대신, 이들에게 허락된 선택지는 카페와 편의점의 아르바이트, 혹은 물류센터의 일용직 노동뿐입니다. 


그렇게 청년들은 ‘최저시급’이라는 견고한 벽 앞에서 좌절하며,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진 현실을 몸으로 체감하게 됩니다.


계층 이동의 통로가 봉쇄된 사회에서 노동은 더 이상 미래를 설계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루치의 생존을 구걸하는 영수증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구조적 절망이 필연적으로 정치적 괴물을 소환한다는 점이에요.


대중이 더 이상 노력으로 삶을 개선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사회는 논리적인 대안 대신 명확한 '분노의 대상'을 갈구하게 됩니다.


프랑스의 '노란 조끼 저항'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한편, 텅 빈 주머니와 박탈감을 먹고 자라는 포퓰리즘과 급격한 우경화는, 과거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 속에서 히틀러라는 광기를 잉태했던 토양과 무서울 정도로 닮아 있죠.


현대의 선동가들은 알고리즘을 이용해 대중의 확증편향을 자극하며 "너희의 고통은 저들 때문이다"라고 속삭입니다.


시스템이 자정 능력을 상실하고 거대 자본과 권력이 결탁한 시대에, 우리는 다시 한번 전체주의의 문턱에서 넘어질 뻔했던 경험을 하지 않았던가요?


그러나 이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찾는다면,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기술이 가져온 정보의 민주화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거대 언론이 광고주인 자본의 눈치를 보며 침묵할 때, 이름 없는 목격자들의 SNS와 1인 미디어들은 현장의 진실을 실시간으로 퍼 나르는 디지털 환경입니다.


'욕설 매뉴얼'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 또한 조직화된 언론의 힘이 아니라, 파편화된 개인들이 연결되어 진실의 조각을 맞춘 결과 아니던가요?


결국 우리를 구원할 최후의 보루는 개개인의 비판적 사고 능력, 즉 '리터러시(Literacy)'입니다.


쏟아지는 선동과 가짜 뉴스 속에서 본질을 꿰뚫어 보고, 내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읽어내는 눈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유일한 무기인 것이죠..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를 갖춘 깨어있는 개인들이 존재하는 한, 아무리 정교한 알고리즘과 위압적인 매뉴얼이라도 인간의 영혼까지 통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무는 2025년, 이 글의 파편들이 누군가의 가슴에 박혀 세상을 비추는 작은 유리 조각이 되었으면 합니다. 


거대한 자본의 파도 아래 짓눌린 인간의 가치가 다시 숨을 쉬고, 각자의 고유한 존엄이 최저시급의 무게에 바래지 않는 세상을  꿈꿔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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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문화칼럼니스트 이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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