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중국 지도를 봤을 때 상하이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곳은 왠지 낯설다. 그 낯섦은 지명에 대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닝보, 원저우(溫州), 푸저우(福州), 추안저우(泉州), 샤먼(夏門) 같은 도시는 물론이고 옌탕산이나 우이산도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한 여행이 거의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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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탕산

 

하지만 이곳은 결코 우리와 먼 도시만은 아니다. 닝보의 옛 지명은 명주(明州)로 송과 육로가 막힌 고려는 배를 통해 이곳과 적지 않은 교류를 했다. 그 아래인 추안저우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도시에 우리 선조들의 흔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교류가 가장 명확해진 것은 최부라는 한 인물을 통해서다. 1487년 죄를 짓고 도망간 이들을 잡는 임무를 띠고 제주로 파견된 최부는 고향 나주에서 들려온 아버지의 부음을 듣는다. 

 

35세의 그는 태풍이 채 그치기도 전 뱃군들에게 지시해 육지로 가는 배를 출발시킨다. 하지만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배는 표류하고, 천신만고 끝에 중국 동부의 한 해안에 닿는다. 

 

처음에는 왜구로 오해받아 고통을 겪지만 그의 신분이 밝혀지자 황명으로 길을 출발해 중국 동부를 지나서 우리나라로 돌아온다. 

 

그 기록이 〈표해록〉인데 〈동방견문록〉, 〈하멜 표류기〉와 더불어 세계 3대 여행기로 꼽히는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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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의 표해록


그가 도착한 곳은 지금의 저지앙성 린하이(臨海)다. 구글 어스에서 제주에서 린하이까지는 직접 거리로 재어 보면 720km 정도니 적지 않은 바닷길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래도 멀다고만 할 수 없는 길이다. 

 

사실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는 이 길을 다니던 무역 항로가 적지 않았으니 아주 가까운 길이다. 실제로 저지앙이나 푸지엔에는 우리 민족이 모여 살던 신라방이나 고려촌 같은 지역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곳이 필자를 가슴조이게 하는 것은 서하객이란 인물 때문이다. 이 중국 동남해안의 가장 위쪽에는 중국 불교 4대 명산인 푸투오산이 있다. 

 

푸투오산은 바다 위에 만들어진 불교 명산으로 다양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원저우 인근에는 옌탕산이 있다. 중국 여행의 살아 있는 신화인 서하객(徐霞客 1586~1641)이 가장 좋아했던 곳이 옌탕산이고, 그에 못지않게 좋아했던 곳이 우이산이다. 

 

그는 수차례씩 이곳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기록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탐험가답게 다양한 코스를 개발했다. 중국 여행가의 대명사인 서하객은 항상 여행을 꿈꾸는 기자에게 있어서도 가장 흠모할 만한 인물이다. 

 

명 만력제 14년(1587년)에 지앙쑤성 지앙인(江陰)에서 태어난 서하객(원명 홍조弘祖)은 아버지가 강도들에게 피습당해 죽는다. 

 

거기에 서하객이 살던 지앙인 인근 우시(無錫)에는 동림서원(東林書院)이 있었는데, 이곳이 동림당이 처음 생겨난 곳이다. 

 

동림당은 만력제 때 강압정치에 반대하던 학자 출신의 거사 집단이다. 훗날 환관 위충현(魏忠賢)의 탄압(1625∼1626)으로 몰락의 길을 걷는 학파인데, 학문과 의지가 뭉쳐진 학문 그룹이다. 

 

서하객도 이 동림당에 심취해서 학문을 배운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 왕씨는 아들의 운명을 감지했는지 직조업으로 돈을 벌어서 아들의 여행을 권장한다. 

 

거기에 결혼한 허씨가 아들만을 남기고 죽자, 그는 서서히 여행에 심취한다. 당시에는 쉽지 않은 길이었던 광시나 윈난까지의 여행을 감행하는데, 그는 남들이 가지 않은 장소에 대한 탐구욕도 강해서 점차 탐험가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많은 곳을 찾았지만 서하객이 가장 사랑했던 곳은 옌탕산이었다. 1613년 첫 번째로 옌탕산을 찾은 후 그는 1632년에 두 번 옌탕산을 찾았다. 화산이 바닷가에서 분출해 다양한 모습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지질학상으로도 가치가 있는 산이다. 

 

서하객은 옌탕산의 산길에서도 탐험가의 소질을 발휘해 롱비(龍鼻)동굴 등을 발견했으며, 낙차 197m의 거대한 폭포인 따롱추(大龍湫) 폭포의 발원지도 산길을 직접 헤매어 적어 놓았다. 

 

서하객은 그밖에도 톈타이산(天台山), 황산, 우이산, 루산 등은 물론이고 베이징이나 멀리는 광시, 윈난까지 들르는 여행가의 면모를 보였다. 

 

일행은 우선 따롱추를 봤다. 물이 많지 않았지만 197m 위에서 쏟아지는 한 줄기 물길이 바람을 따라 호수 위에 괘적을 남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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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롱추

 

서하객의 여행기는 훗날 집안이 청조의 침입으로 몰락하면서 화재 등으로 거의 소실됐다. 그런데 서하객이 죽은 지 43년 후에 그의 기록을 정리해서 다양한 여행기를 펴낸 이가 이기(李奇)다. 

 

이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건륭 41년인 1776년에 〈서하객 유기(徐霞客 遊記)〉가 출간된다. 그런데 이기는 서하객이 고향에 잠시 들렀을 때 정을 나누었는데, 서하객이 다시 여행을 떠난 후 집에서 쫓겨나 재가한 후 태어난 아들이었다. 

 

성씨도 다르고, 아버지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지만 흔적을 쫓아서 펴낸 가족사의 아이러니가 인상적이다. 사실 그의 어머니도 그 시간에 쫓겨나지 않았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것을 생각하면 더 미묘한 느낌이 든다. 

 

사실 푸젠 성 추안저우(泉州)나 저지앙 원저우(溫州), 명주(明州)로 불리던 닝보(寧波) 등은 고려시대부터 우리나라와 많은 교류가 있었던 도시들이다. 

 

폐쇄적인 국가 정책과 왜구의 강세로 교류가 끊어지면서 미리 나온 정착민은 고향을 잊어가야만 했을 것이다. 그들은 봄이면 고향땅으로 휠휠 날아가는 제비들을 얼마나 부러워 했을까. 그 제비들의 여정을 생각하며 선잠에 빠져들었다. 

 

글/사진= 조창완 여행 작가,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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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절경, 중국 동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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